남한강 상류인 골지천과 송천이 만나 합수되는 아우라지를 중심으로 물물교역과 수류를 이용한 교통이 잘 발달되었던 지역으로 예로부터 아리랑의 발상지로도 유명하다. 곡물 등의 생산은 하천변으로 길게 형성된 평지와 산간 화전에서 경작되는 농작물의 생산이 비교적 많으며, 구절리 자개골 심산 유곡에서 채밀되는 토종꿀은 건강식품으로 유명하다.
(1) 상동(上洞)
본 리 소재지 윗마을로 상동이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상동에 옛나루(餘糧津)가 있었다.
(2) 하동(下洞)
본리 소재지 아랫마을이란 뜻에 하동(下洞)이라고 하였다한다. 샘물과 보(洑)물이 풍부하여 논, 밭농사가 풍작을 이루는 마을이다.
이 마을 뒤로 골지천과 송천이 합치는「아우라지」나루터가 있어 관광객 운집이 날로 많아진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하여 냇물고기가 많고 강변이 넓어 여름 한철 피서지로 유명하며 아래와 같은 정선아리랑 노랫말이 파생되기도 한 곳이다.
(3) 다래평(多來坪)
본래 이 마을은 염장산(鹽藏山) 아래 여량 시장 뒤편에 위치한 택지(擇地)로서는 가장 적합한 지대이다. 좌우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가 있는데 앞에는 넓은 농지가 펼쳐져 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이 오가는 들판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4) 절골(寺谷)
여량리 앞산이 옥갑산(玉甲山)인데 이곳에는 절이 2개소 있다. 아래 있는 절은 하옥갑사, 산 정상에 있는 절을 상옥갑사라고 칭한다. 절이 있다하여 절골 또는 사곡(寺谷)이라 한다.
(5) 마산치(馬山峙)
옛날에 여량역(파발) 역마(驛馬)를 사육(飼育)하는데, 여량리 옆산 마산치에다 말을 방목했다고 해서 마산치(馬山峙)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6) 가금(加金)
원래 이곳은 백사장이었는데 어느 때 홍수에 유실되어 자갈밭으로 되었다. 이곳을 평안도「정감록」파가 동학란 때 피난 온 사람들이 정착하여 개척한 곳으로 지금은 옥토로 변하고 약80년 생 밤나무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 뒷산으로 상원산 줄기와 앞으로 고양산이 솟아있고, 구절리에서 흐르는 송천이 이 마을을 감싸고돌아 골지천과 합류하여 아우라지를 이루었다.
이 마을을 아홉 가지의 미를 지닌 내라하여 일명 가구미(加九美)라고 부르는데 그 아홉 가지는 그러하다. 옥갑사 종소리, 마산봉 자동차길, 고양산에 떠도는 구름, 곰바리 문산, 유문재 아침해, 달뜬골 달맞이, 송천의 고기잡이, 갈금의 백사장, 삼투베리와 험한 길 9개소다.
(7) 녹고만(綠庫滿)
옛날부터 마을이 아름답고 농사도 잘 되어 복과 양식이 가득한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인데 한자표기로「녹고만(綠庫滿)」이라 했다. 일제시대에는 금광이 있었다.
(8) 제단곡(祭壇谷)
반륜산으로 오르는 마을인데 옛날 절이 있었다고 해서「절골」이라 부른다. 일명「제당골」이라고 하는데 반륜산 8부 능선 계곡에서 소원(所願)과 신수(身數)를 비는 제단(祭壇)이 있다. 이곳에 무수한「돌탑」이 있고 샘물이 펑펑 솟아 나와 제물을 지어서「푸닥거리」와 비손(손을 비빔)을 하는 곳이다. 옛날 산간 마을에는 산신(山神)을 믿고 살아왔다.
(9) 당너머
여량리 소재지에서 장열리쪽으로 가다보면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데 솔밭이 들어서 마을 안을 볼 수 없다. 당재를 넘으면 마을을 볼 수 있다하여 당너머라고 한다. 성황당 너머라는 뜻에서 연유된 이름이다.
(10) 곰바리
반륜산 밑에 위치한 마을인데 여량리와 봉정리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 지형이 흡사 곰(熊)이 앉아 있는 형국이다. 웅장한 반륜산(1,068m) 정상은 곰의 머리 같고 마을 양쪽 능선이 앞발을 딛고 있는 모습 같다해서「곰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을 뒷산에「산호동굴」이 있다.
(1) 송천(松川)
본래는 송천리(松川里) 소재지 마을인데 이 바닥에 버드나무 숲이 무성하다고 하여 마을 명칭을 유천리(柳川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유천 1리 소재지는 옛날부터 송림(松林)이 울창한데다 마을 중심으로 송천(松川)강이 흘러 여량리 아우라지 나루를 이루고 있다. 송천마을 상류 주변에는 현재도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이곳 소나무가 하도 잘 자랐기에「경복궁」중수 시 재목으로써「아우라지」나루에서부터 뗏목으로 서울 광나루까지 운송되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2) 싸리골
1894년 동학난을 진압하려던 관군이 주둔했을 때 군량미 저장고가 있다하여「쌀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속칭「싸리골」이라고 하는데 유천 1리에 있는 싸리골은 상원산 계곡 주변 옛날 머리 기름을 짜는 동백(冬柏)나무 밀림이 우거져 여인들이 동백을 따러 떼지어 이곳을 다니며 부른 정선아리랑가사가 애정편의 내용가사이다.
(3) 궁대(宮垈)
옛날 고을 원님이 이곳에서 궁술시합(弓術試合)을 마치고 구절리(九切里)로 왕래하였다는 곳이다. 글자 그대로 보면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궁터가 될 곳은 없다. 관(官)자가 궁(宮)자로 표기된 것으로 본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사까지 아무리 찾아보아도 궁궐로 명하기는 근거가 없다. 다만 활터이기에 벼슬 높은 사람들이 강릉, 정선으로 왕래하였다는 이야기와 궁대는 옛날 절터라고도 하며 궁여가 이곳에 쉬어갔다 해서「궁대」로 붙인 이름이라고 본다.
(4) 관괘동(冠掛洞)
유천3리「갓거리」를 관괘동(冠掛洞)이라 한다.
「궁대」에서 궁술시합을 하고 송천동「가물재」를 넘어 이곳에 이르러 흐르는 땀을 씻으러「갓」을 벗어 걸어 놓았다고 하여 관괘동(冠掛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속칭「갓거리」라고 부른다.
(5) 월부동(月浮洞)
이 부락은 유천2리 속칭「달뜬골」이라고 하는데 마을 뒷산을「동망월등」이라 부르는데 떠오르는 마을 풍경이 아주 아름답고 또한 마을 뜨는 주민이 달과 같이 둥글게 살아간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6) 지경동(地境洞)
강릉행 국도 변 유천리와 임계면 반천리 경계를 이루고 있다하여 지경(地境)이라 불렀다.
(7) 개금골
옥갑산과 상원산 밑에 있는 마을인데 마을 뒷산에「개금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마을 앞으로 구절선 철도가 있고 명주군 왕산면 대기리에서 흐르는 송천이 앞으로 흐른다.
(8) 마평(맛두둑)
고버덕산 밑에 양쪽 구렁「밭두둑」이 많은 마을인데 동학란 때 관군이 일시 주둔할 때 「말」을 먹였다하여「마평」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속칭「맛두둑」이라고 한다.
(9) 흥터
이 마을은 경관이 빼어난 평지 마을이다. 앞으로 송천(松川)이 흐르고 구절 철도가 마을 중심으로 지나간다. 옛부터 이곳에 살면 부자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일어난다는 뜻의 흥(興)터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0) 양지마을(陽地村)
유천 2리 양지마을은 산기슭에 위치한 곳인데 글자 그대로 양지 바른 곳에 있어「양지마을」이라고 한다.
(11) 유문재(柳門峙)
여량리 소재지에서 임계면으로 가는 중간 유천 2리에 들어서는 잿마루인데 도로 양편으로 버드나무가 무성하여 마치 문을 들어서는 느낌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 전곡(前谷)
원래「앞실」이라는 마을인데 한자표기로「앞에 있는 골」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2) 수물골(二十谷)
옛날에는 부모에게 효(孝)를 하려면 부모가 돌아가시고 3년 상까지 부모 묘소에서 함께 생활을 한다. 이것을「시묘살이」라 하는데 이골은 시묘살이를 했다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3) 삼거리(三街洞)
선양초등학교(선양분교장)에 이르면 세 갈래 길이 있는데 큰골과 고창골로 들어가는 삼거리다. 그래서 삼가동(三街洞)이라 붙인 지명이다.
(4) 대곡(큰골)
고양산 재 밑에 위치한 마을인데 골이 깊어「큰골」이라 부른 지명인데 한자표기로 대곡(大谷)이라고도 부른다.
(5) 고창골(古昌谷)
옛날부터 양지(陽地)바른 마을로 농사가 잘 되는 곳이라 하여 일명 곡창곡(穀倉谷)이라 부르기도 하나 고창골(古昌谷)이라 부르는 것이 바르다.
(6) 신기(新基)
시묘(侍墓)골 들어가는 마을인데 일명「새터」또는「갈래실」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해서 부르게 된 지명이다.
이곳에는 용소(龍沼)가 있는데 수백 년 전에 용이 나와 등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은 이 소(沼)가 메워지고 개천이 되었으나 이 부근에는 용이 나와 절벽을 뚫고 올라간 흔적이 뚜렷한 용바위만 남아 있어 이 현장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실감케 한다.
(1) 본동
구절(九切) 소재지이다. 원래 명주군 왕산면에 속했다가 1973년 7월 1일자로 정선군 북면에 편입되었다.
옛 구절리하면 산간오지에 농사도 잘 안 되는 곳으로 알려졌다. 노추산을 중심으로 송천(松川)이 양의 창자처럼 굽이굽이 돌아 정선―강릉으로 오솔길 따라 약종상과 입산수도(入山修道)하는 사람들이 왕래가 있었다.
이곳 주민들은 해마다 노추산 이성대(二聖臺)에 성인 위패를 모시고 음력 9월 中丁(중정)일에 고유제(固有祭)를 국한하여 정성껏 올리고 이성대 관리 보존에 관심을 갖고 있다.
(2) 왕신(往信)
명주군과 정선군의 경계를 이룬 광산촌인데 예나 지금이나「노추산」을 찾는 행인들이 이곳에 머무르게 되는 지점이다. 공사간 명주, 정선 상호 연락 교환지점인데 여기에 연유된 왕신(往信)이라고 부른 이름이다. 일명「종량동」「왕신」이 통신을 보내는 사람이라고 한다. 노추산에서 흘러내리는 소계천이 마을 좌우로 흐른다.
(3) 절골
노추산 대성사(大成寺) 절로 왕래하는 계곡의 마을이다. 그래서 절골이라고 붙여진 지명이다.
(4) 중동
명주군 왕산면 고단리와 왕래하는 깊은 계곡의 마을이다. 구절리 중심 동쪽으로 위치했다하여「중동」이라고 한다. 이 마을은 계곡 주변을 따라 협소한 경지에 생약을 주작으로 하고 있다. 마을은 계곡에 띄엄띄엄 형성되었고「노추산」에서 흐르는 세천이 맑게 흐른다.
(5) 양지마을
구절리 본동 하천 건너 다락산(多樂山) 밑의 광산주택 단지화 촌락인데 노추산을 앞산으로 하여 양지바르고 경관이 좋은 마을에서 유래되었다.
(6) 자개(自開)
구절리 가기 전 삼거리에서 북쪽으로 평창군 도암면 봉산리와 인접한 지역인데 상원산과 다락산 사이에 긴 계곡 따라 있는 독가촌이다. 하자개와 상자개로 구분되어 있다.
옛날에 상자개 산중턱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가 흡사 문같이 생겼다. 자시(子時)면 저절로 바위가 벌어졌다가 닫친다고 해서 스스로 자(自)와 열 개(開)자를 써서 자개라고 불렀다. 그 자개바위는 언제 없어졌는지 지금은 그 자리에 탑 같은 바위가 있다.
(1) 상고사리
남곡의 소재지다. 강릉, 정선간 국도 변「큰너근령」밑에 여량초등학교 남곡분교장이 있는데 고랭지대로 토질이 비옥해서 채소재배를 주작으로 하고 있다. 특히 이 지역 일대는「고사리」가 많아서 고사리를 꺾어 농가소득에 한몫하고 있다. 옛날에는 고사리를 꺾어 소도 사 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고사리」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2) 앞실골
남곡리에서 볼 때 이 마을은 앞에 있는 골이라는 뜻인데 앞실곡은 세골로 부락을 이루었는데 샛골, 간곡, 자궁골이 있다. 인접 부락으로 명주군 왕산면 고단리, 임계면 송계리 송현동이다.
(3) 북바위
정선, 강릉간 국도 변 남곡초등학교 가기 전 약 1㎞ 지점에 흡사 큰북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행인들의 눈길을 끌었는데 도로 확장공사 때 없어졌다. 그래서 북바위 이름을 붙인 마을이다.
(4) 되골
국도 변에서 협소한 계곡에 위치한 산간 마을인데 이 마을을 통행하자면 힘겹고 고되다하여「되골」이라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5) 하고사리
되골 입구의 마을인데 이 지역도 고사리가 많이 생산된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 늠바위
이 마을은 유천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바위가 많은 지역이다. 특히 석질 좋은 대리석이 매장되어 있는 늠바위(凜岩)라 이름하였다 한다.「늠」이란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1) 새치
지경동과 봉정광업소 앞 마을로 넘나드는 마을이라 하여 사이에 있는 재(峙)란 뜻으로 부르게 된 지명이라 한다.
(2) 발면(發綿)
옛날에 이 부락을 왕래하기는 참으로 아찔아찔 하였다. 반륜산 기슭 절벽 오솔길을 오르락내리락 손에 땀을 쥐고 다녔다. 홍수 때나, 폭설로 고립되기 일수였다. 그러나 마을은 사방 병풍처럼 산이 둘러 쌓여 있는 탓인지 따뜻해서「목화」가 잘 된다하여 발면(發綿)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3) 벌마을
내봉정 교량 건너 하천벌이 있는데 이를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벌마을이 생겼다하여「벌마을」이라 부른다.
(4) 옛골
옛날에 봉정리가 협소하나 일개「골」로써 다루어졌다 하는데 이곳 앞 강 소(沼)가 관(官)터 자리라 한다. 그래서 옛골 관터라 하여「옛골」이라고 불렀다 한다.
(5) 내봉정(內鳳亭)
본리의 소재지다. 옥밭 둔지란 밭 1,000평이 있는데 이곳이 곧 옥(獄)터라 한다. 그 곳에 집이 있었는데 밤이면 땅속에서 요란스러운 소리와 비명이 계속 들리고 문짝이 떨어져 나가는 등 소름끼치는 일들이 자주 생겨 그곳에 못 살고 이사하였다 한다. 밭을 갈 때도 땅 속이 쿵쿵 울리는 소리가 난다고 하면서 옥터이기에 귀신 짓이라고 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하여 오고 있다.
이 마을 앞 강 건너 벼랑에 정자가 있었는데 정자주위 노송에 학(鶴)이 날아들었다 하여 봉정(鳳亭)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