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엽에는 평창군 동면 관할로 있었으나, 1906년 평창군에서 정선군으로 편입되면서 신동면이란 지명을 갖게 되었다. 1950년 광산개발로 상주인구가 차츰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70년대 후반, 에너지파동으로 인해 석탄소유량이 늘어나자 인구도 급격히 증가하면서 신동면이 신동읍으로 승격되었다.
(1) 의림길(義林吉)
예전에 읍사무소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집단 부락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의 예미농협 위에서부터 납돌다리가 있는 곳까지를 말한다.
(2) 유문동(柳門洞)
예미리에서 동북쪽으로 들어가 고성 터널과 중간쯤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마을 어귀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마을 주변으로 고목(古木)이 많으며 지금은 높이 20여 미터 둘레 6~7미터의 400년 된 느티나무가 마을의 수호목으로 서 있다.
(3) 납돌(納乭)
의림길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일설에는 냇물이 흐르는 바닥의 돌이 넓다 하여 생겨난 지명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영월 엄(嚴)씨로 인해 생겨난 지명이다.
(4) 노일(魯日)
상노일과 하노일이 있었다. '노일'이라고 하면 보통 상노일(上魯日)을 말하는데, 지금의 예미역 앞 마을부터 예미우체국까지 일대이다.
(5) 배영거리
구 읍사무소가 있는 곳 주변에 의림길이라는 집단 부락이 있었는데, 의림길에 온 손님을 맞아들이고 배웅할 때 이곳까지 나왔다고 해서 '배영거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6) 용주골
예미역 바료 앞 산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 이 골짜기에서 용 한 마리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 자리에서 샘물이 솟기 시작해서 '용수골(龍水谷)'로 불렀다. 세월이 흐르면서 '용수골'은 '용주골'로 변했다.
(7) 장터거리
지금의 예미농협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 옛날부터 사람이 번성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음이다.
(8) 비석거리
구 읍사무소 입구 아래를 말한다. 예전부터 면장의 공적비, 송덕비가 세워져 있었으므로 '비석거리'라고 불렀다.
(9) 큰구지
유문동에서 고성터널에 이르기 바로 전 오른쪽으로 난 언덕배기를 말한다.
(10) 공원산
지금의 예미농협 뒷산이다. 산꼭대기가 평평해 해방 전까지만 해도 정자가 들어선 공원이 있었다고 해서 '공원산'이라고 불렀다.
(11) 구래기재
예미에서 유문동을 거쳐 고성리로 넘어가는 재로'고성리재'라고 부른다.
(1) 원천포(元泉浦)
천포리의 중심에 있는 마을로 38번 국도 옆에 있는 마을이다.
(2) 곡기리(曲吉)
원천포 남쪽에 있으며 골안 소나무의 자태가 완만한 능선과 잘 어울리는 마을이다. 마을 뒤로 구불구불한 골이 있으므로 '곡골(曲谷)'이라는 이름이 생겼는데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곡길'이 '곡기리'로 되었다.
(3) 양지마을
원천포 맞은편 산자락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남쪽을 향해 있어 항상 밝은 햇빛이 드는 곳이므로 '양지마을'이라고 한다.
(4) 오리터
곡기리에서 영월군 중동면 화원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터'는 위치를 나타내는 말로 곡길에서 고갯마루까지 대략 오리(五里)가 된다고 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5) 안골
원천포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골짜기 안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6) 골마을
안골 유원지를 지나 안쪽으로 산자락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다. 안골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골마을'이라고 한다.
(7) 주막거리
지금의 저탄장 주변으로 정선과 영월을 왕래하는 관문으로서 주막들이 있던 곳이다.
(1) 원가사(元佳士)
가사리의 본 마을이라는 뜻으로 지금은 폐교되어 사라진 가사분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2) 남애(南崖)
원가사 입구를 지나 38번국도 서쪽 높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오래 전부터 운치리 돈니치와 터골에서 가사리로 통하는 길이 나 있었다. 그 무렵 사람들이 가사리가 보이는 정상에서 남쪽 가파른 고개를 바라보면 낭떠러지 같다고 하여 '남애'라고 했다.
(3) 마차(磨磋)
마차재 꼭대기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북쪽 벽암산(霹巖山)에서 뻗어 온 산세가 옥녀가 앉아 머리를 빗는 형국인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이어서 '마차'라고 한다.
(4) 머드레이
두리곡 북쪽에 있는 마을로 '황장골'이라고도 한다. 골 안이 넓고 평평해서 '머드렁'이라고 부른 것이 변해 '머드레이'라고 불렀다.
(5) 곰봉
큰 곰이 살았다고 해서 '곰봉'이라고 한다지만 사실은 크고 높은 봉우리라고 해서 곰봉이라고 한다.
(6) 새덕
원가사 안쪽에 있는 마을로 골과 골 사이의 마을이라고 해서 '새덕'이라고 부른다.
(7) 피실
원가사 위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시절이 어수선하던 때에 난리를 피하여 온 사람들이 살았다고 해서 '피실'이라고 부른다.
(1) 벌말(坪丘)
신동읍 소재지인 예미에서 고성터널을 빠져나가 언덕 아래에 있는 첫 마을이다. 평평한 산자락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해서 '벌말'이라고 불렀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마을 이름을 한자화하면서 '평구(坪丘)'로 쓰기 시작했다.
(2) 고림(古林)
벌말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한가운데에 노송(老松)이 숲을 이루고 있어 '고림'이라고 불렀다.
(3) 수촌(水村)
벌말 북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로 '물추이'라고도 한다. 마을 위로는 큰골과 안골이 있으는, 큰골에서 내려오는 물이 아무리 가문 날에도 마르지 않을 만큼 물이 풍부한 마을이라고 해서 '수촌' 또는 '물촌', '물추이'라고 한다.
(4) 자르메
창마을에서 서쪽으로 덕내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을 낀 산세가 자라가 얻드려 있는 형국이어서 '자르메'라고 한다. '자르메'를 '병산(柄山)'이라고도 불렀다.
(5) 창마을(內倉)
고성리 중심지에 있는 마을로 '내창', '창터'라고 한다. 조선시대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 균세(均稅)를 징수하여 보관하던 곡창(穀倉)인 동창(東倉)이 있어서 생겨났다.
(6) 고방(古芳)
창마을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성리 산성 아래에 있는 마을로 예로부터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고방'이라고 부른다.
(7) 고성(古城)
지방 기념물 제68호로 고방마을 앞산에 있는 석축 산성이다. 축성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고구려가 남진을 하면서 전초 기지나 후방 기지로서의 역할을 했던 요새로 추측한다.
(8) 미구재
고림 남쪽에 있는 고개다. 터덕골로 올라 고고산 자락인 이 고개를 넘으면 영월군 중동면 연상리 미구(美九)에 이른다고 하여 '미구재'라고 부른다.
(10) 쌀골
수촌 맞은편 산자락에서 서쪽으로 난 골짜기이다.
(1) 납운돌(納雲乭)
동강변 남운교를 지나 갈벌 동쪽으로 난 골짜기를 따라 3백여 미터 들어간 곳에 있는 마을이다. 개울에 넓은 반석이 있다고 해서 '너븐돌'이라고 했는데, 옛 족보등 문헌에는 광석리(廣石里)로 표기하고 있다.
(2) 점치
수동 남쪽의 강변 마을이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옛날 이곳에 유명한 점쟁이가 살았다고 해서 '점치'라고 불렀다고 한다.
(3) 수동(水洞)
본래 지명은 지메(芝旀)였다.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물이 백운산에서 흐르고 앞으로는 강물이 풍부하다고 해서'수동(水洞)'이라고 한다.
(4) 번들
수동에서 강 건너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다. 산사면에 형성된 넓은 평지를 '번들' 또는 '둔들'이라고 해서 마을 이름이 '번들(飜坪)'로 되었다.
(5) 돈니치(敦泥峙)
운치리 중심 마을로 납운돌 동남쪽에 있다. '진흙땅이 부드럽다'는 지명처럼 흙이 차져 길리 질면 다니지도 못할 정도라고 한다.
(6) 기일(基日)
돈니치에서 남동쪽으로 7백여미터 떨어진 마을이다.
(7) 터골(基谷)
돈니치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골짜기 안에 절터가 있어 '터골(基谷)이라고 한다.
(10) 말구리재
운치리에서 예미리 유문동으로 넘어가는 험한 고개이다. 옛날에 신랑, 신부가 말을 타고 가다가 이 고갯길에서 굴러 떨어져 죽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1) 어름굴
납운돌을 지나 돈니치를 향해 오르다가 탑서낭당이 있던 곳에 거의 이르러 고말잔등 산사면에 있는 굴이다.
(1) 함백(咸白)
1940년 함백산 연맥인 두리봉 일대에서 엄청난 양의 석탄이 매장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1950년 대한석탄공사가 창립되고 방제리에 함백광업소가 채광을 시작하면서 생겨난 지명이다. 당시 외지 유입인구가 크게 늘어마면서 신동읍 조동리와 방제리는 광업소의 이름을 따 '함백'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크게 밝다'는 뜻인 '함백(咸白)'은 광업소가 문을 닫은 지금도 조동리와 방제리를 통칭하는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2) 절골
길운 장미주택을 지나 동쪽에 있는 골짜기다. 골짜기를 따라 오르면 새비재로 가는 길과 연결되어 있다.
(3) 덕말
길운 동쪽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언덕 위에 있어 언덕마을 이라고 했는데, 이를 줄여 덕마을이라고 했고 다시 '덕말'이 되었다.
(4) 구룡동
조동시장 남쪽 아래 골안을 중심으로한 마을이다. 옛날 새골에 들어와 처음 정착했던 사람들 중 일부가 새로운 거처를 정하려고 지금의 구룡천(九龍川)을 지날 무렵 아홉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비가 쏟아져 그곳에서 정착했다 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5) 길운(吉雲)
예미산자락 아래서부터 함백고등학교 위까지 형성된 마을이다. 함백광업소가 생기 전 조동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기도 했다.
(6) 조동(鳥洞)
본마을은 함백지역 중심부락인데 광산집단 소도읍 지대이다. 지형이 새가 알을 품은 형국이라 하여 조동이라 칭한다고 한다.
(7) 안경다리
함백광업소가 개발되고 함백역에 이르는 철도가 개설되면서 놓인 다리가 쌍굴로 안경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8) 개미촌
마을 사람들이 순박하고 개미같이 일만 하는 마을이란 뜻이다. 협동심도 강하고 열심히 생활하는 마을이라는 뜻에 개미촌이라 하였다고 한다.
(1) 매화동(梅花洞)
웃방제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빼곡한 산에 둘러 쌓인 마을의 지형 지세가 매화꽃이 땅에 떨어진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어서 '매화동'이라고 불렀다.
(2) 미륵
함백역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 동쪽 골 안에 대한불교 태고종 미륵암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3) 단곡(檀谷)
안경다리를 지나 두리봉으로 오르는 골 안쪽의 계곡을 말한다. 옛날부터 주변에 박달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4) 새비재(鳥飛峙)
함백역 남쪽 질운산 자락에 있다. 고개를 이룬 산의 형상이 새가 날아가는 모습과 같다하여 '새비재'라는 지명이 생겨나게 되었다.
(5) 독가촌
새비재 동쪽에 있는 마을로 '전략촌'이라고 한다.
(6) 장재터
다래산 아래로 난 태백선 철도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부터 신동읍에 정착한 부자들이 살던 곳이라고 해서 장자(長者)터라 했는데 그 말이 변해 '장재터'가 되었다.
(7) 덕쇄(德鎖)
함백광업소 전탄장 위쪽으로 언덕 위 넓은 평지밭(坪田)에 있다. 언덕에 둘러싸인 산등이 평평하다고 해서 '덕시'라고 부른 것이 '덕쇠'가 되었다.
(8) 안터(內基)
안경다리에서 보면 골 안쪽 산능선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안터'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