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구역상 오늘날의 면(面)에 관한 기록이 처음 생긴 것은 실제로 조선시대에 와서 부터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정선군의 호수(戶數)는 203가호였고 인구는 모두 459명이었다. 3백여 년이 지나 발행된 <여지도서>에는 정선의 인구가 1,999가호 8,316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남면은 상리와 하리등 2개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상리는 능전, 증산, 별어곡, 소마평, 유천 등지였으며, 하리는 입탄, 북천, 초두평, 화암, 웅동이었다. 1871년 <관동읍지>가 간행되던 시기까지 상리와 하리등으로 구분되던 남면은 언제부터인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남상면과 남하면으로 개편되었다. 1910년10월 25일 내부령(內部令) 제8로로 공포한 <江原道 面整理에 關한 件>으로 남상면과 남하면을 없애고 남면을 설치했다. 1936년 병자년 수해로 면사무소 건물 일부가 유실되는등 큰 피해를 입게 되자 남선초등학교 아래 현재의 천주교회 자리로 이전을 했다. 6·25전쟁 때 피해를 입었던 건물을 수리해서 사용하던 남면사무소는 1957년 9월 10일 현재의 남선초등학교 아래로 이전했다가 1958년 8월 18일 현재의 위치인 남면 문곡1리 103-1번지로 이전했다. 1991년 12월 27일 지하1층, 지상2층 총 281.7평의 건물을 신축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남면의 관할구역은 1974년 군조례 360호에 의거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7년 현재 남면의 행정구역은 5개 법정리, 15개 행정리, 79개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1) 별어곡(別於曲)
일부에서는 마을 앞 동쪽 강변에 자라(鼈)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어 '별암'이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인근 마을도 자라 별(鼈) 자를 따 별어실(鼈魚室) 또는 별어곡(鼈魚谷)이라고 했다고 하나 자라바우와 별어곡은 연관성이 없다. 고종8년에 편찬한 <관동읍지>등 대부분의 문헌에는 '別於谷'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별어곡의 우리말 표현은 '큰 벼랑이 있는 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이다.
(2) 음지촌(陰地村)
남면사무소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산 그늘에 가려 응달이 지는 시간이 많아 '응달마을'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을 한자로 써서 '음지촌'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현재 음지촌에는 문곡중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3) 무은담(霧隱潭)
문곡리 동쪽으로 증산으로 가는 38번 국도변에 있다. '물안개에 냇물이 드러났다 감춰줬다 하는 연못'이라는 뜻으로 선경(仙境)을 일컫는 지명이다. 전설에 의하면 정암사 탑을 건립한다는 소문을 듣고 마귀할머니가 탑을 쌓을 돌을 운반하던 중 수마노탑(보물제410호)이 완공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치마폭에 나른 돌을 버리고 간 자리가 300여 평의 돌담이 되었는데 이것을 '무은담'이라 불렀다고 하며 이 돌담은 오래전 철도와 도로를 보수할 때 다 써 버렸다고 한다. 무은담은 '무릉담'으로 불리기도 한다.
(4) 감자나루터
옛날 이곳의 물이 깊어서 배로 왕래했다고 해서 감자나루터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강가에 흐르는 물이 검고 소(沼)가 있어서 '감진천'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변해 '감자나루터‘가 되었다.
(5) 웅동(熊洞) (고무골)
자미원 서쪽 신동으로 가는 38번 국도 변에 있는 골짜기 마을이다. '고무골'은 '큰산 골짜기'를 뜻하는 '곰골'에서 나온 말이다. 이를 한자로 쓰면서 '곰'을 동물인 '곰'으로 보아 '熊'을 써 '熊洞'이 되었다.
(6) 탑거리
남면 소재지에서 고무골로 향하는 길 옆 수광암 입구를 말한다. 약150년 전에 수광당이라는 승려가 골짜기에 암자를 건립한 후 3년 만에 골짜기 입구 마을 가에 돌탑을 세우면서 '탑거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7) 점촌(店村)
다고 해서 '점촌'이라고 한다.
(8) 자미원(紫微院)
별어곡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정선에서 영월 상동으로 여행할 때 두위봉을 넘어서 가야하기 때문에 숙박할 수밖에 없으므로 현재 수리치터널 아래에 원(院)을 지어 여행객으로 하여금 불편 없이 여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여 그 당시는 "자기 스스로 맛을 보고 잠을 잤다"하여 자미원(自美院)이라 불리게 되었으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느 학자가 자기 성명에다 마을 이름을 풀이해 보니 스스로 자(自) 보다는 검붉은 자(紫)가 붙으면 자손만대를 누릴 수 있다고 해서 현 자미원으로 불려 졌다고 한다.
(9) 중간마을
문곡 삼거리에서 자미원역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자미원초등학교가 있던 마을로, 자미원의 한 가운데에 있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10) 통노골
남면에서 신동읍의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신동읍으로 통하는 통로에 있다고 하여 '통노골'이다.
(1) 증산(甑山)
동에 고부산, 북에 지억산, 남쪽에 두위봉이 둘러선 가운데 시루봉(甑峰)이 있어 증산(甑山)이라 하였다.
동남천이 부락중심을 관류하고 층암절벽과 기암괴석이 무릉도원의 절승이며 전답의 농경지도 면내에서 가장 광활한 지역이다. 1992년 폐광지역 경기 활성화를 위해 증산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2) 묵산(墨山)
이 마을 주변의 산이 검은 돌로 뒤덮여 늘 검게 보인다고 해서 '묵산'이라 한다. 이곳은 묵산광산이 있어서 사람들로 붐볐던 곳이다.
(3) 능전(能田)
덕만 북쪽 임계로 가는 421번 지방도로 옆에 있는 마을이다. 약200년전 이곳에 지관이 지나다가 쉬어가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지관에게 이 마을의 지세에 관해서 묻자 ‘이 곳은 산세나 지세를 보아서 고을이 깊고 편편하니 능전이오’라고 했다고 한 이래로 불러온 이름이라고 한다.
(4) 발구덕(發九德)
민둥산 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으로부터 약300여 년 전 평해 황씨가 이주하여 움막을 짓고 개척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크고 작은 분지로 된 구덩이가 여덟 개로 형성되어 있어 '팔구데이'라고 불리어 왔으나 이를 한자로 차용하는 과정에서 '발구덕'이 되었다.
(5) 싸리실
덕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400여년전 전주이씨 이기업과 그의 가족이 처음 이주하여 정착한 마을이라고 한다. 화전을 개간한 토지에서 농사가 잘되어 곡식(쌀)이 많이 나왔다하여 싸리실이라 불리게 되었다.
(6) 자고치
이 마을은 증산 초등학교 앞에서부터 오르막 고개를 넘어 마을이 있다고 하여<고개넘어 마을>에서<재고개>로 부르는데 한자 표기로 자고치라고 부르고 있다. 일명<시루봉재>라고도 한다.
자고치와 싸리실 주민은 정초에 싸리실 떡쌀을 가지고 시루봉에 가서 싸리나무로 떡을 쪄서 나누어 먹고 윷놀이를 하면서 풍년을 기원하는 풍속이 있었다.
(7) 정지간
증산과 묵산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현재 묵산아파트가 들어선 일대를 말한다. 일설에는 조선 중기 직간이라는 벼슬을 가진 정(丁)씨가 은신처로 삼으면서 마을을 형성했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라고 한다.
(8) 덕만(德巒)
증산 동북쪽 산중에 있는 마을이다. '크다'는 뜻인 '덕(德)'자와 산을 뜻하는 '매'가 더해져 '덕매'라고 부른 것이 '덕마이'가 되고 이를 한자로 차용하면서 지금과 같은 '덕만(德巒)'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9) 자뭇골
증산 서쪽으로 두리봉 자락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두리봉 북쪽 골짜기 아래 마을이라는 뜻으로 'ㅈ·|밑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자뭇골'로 불렀다. 현재는 민둥산과 두리봉을 찾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펜션 숙박단지가 있다.
(1) 잿마을
소마평과 큰골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고개 위에 넓은 들판과 마을이 위치한 곳이라고 해서 잿마을이라고 한다.
(2) 메기돌
농거리와 소마평 사이 철도 주변 옆에 있는 마을이다. 상류 쪽에 보(洑)를 설치해 논에 물을 대면서 쓸모없었던 땅이 기름져 메기가 많이 서식하였다고 하여 '매기들'이었는데 지금은 '메기돌'이라 부르기도 한다.
(3) 소마평(少馬坪)
별어곡 북쪽에 있는 유평리의 중심 마을이다. 조선시대 작은 말이 남창으로 왕래하는 주막거리에서 말을 마당에 잠재우는 마을이라 하여 '소마평'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4) 새마을(新村)
소마평 북쪽 국도를 따라 늘어서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이 마을에 식수가 없어 사람들이 살지 않았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우물을 파서 식수를 얻게 되면서 마을이 새롭게 형성되었다고 하여 '새마을', '새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한자로 쓰면서 신촌이라고 한다.
(5) 한치(汗峙)
삼내약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남면 소재지인 별어곡에서 보면 북쪽 산 깊은 곳 해발 700m의 분지에 형성된 산중 마을이다. 한치의 어원은 산 아래 마을로 오르내리는 길의 경사가 급해 오고가는 사람마다 땀을 많이 흘린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큰 고개' 또는 '큰 산에 있는 마을' 이라는 뜻이다.
한치 마을은 보호수 마을로 유명하다. 수령 650년, 700년된 느릅나무가 있다.
(6) 삼내(三來)
한치 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동쪽 고일과 북쪽 버드내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이 이곳에서 어우러져 고병계곡으로 흐른다고 해서 삼내라고 한다. 아래쪽에는 삼내약수가 있다.
(7) 고일(古日)
삼내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억산 능선 아래에 있는 높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고(高)'자와 마을을 뜻하는 '일(日)'자가 합쳐져 생긴 지명이다. 고일은 오래전 한치에서 화암면으로 넘어가는 교통의 요지이며, 현재도 지억산과 민둥산 산행의 기점이자 삼내약수로 내려가는 초입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8) 버드내(柳川)
한치 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작은 냇물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길게 뻗어있어 '벋은 내'라고 했는데 이 말이 변해 '버드내'가 되었고, 이를 다시 한자로 쓰는 과정에서 버드를 '유천(柳川)'이라고 했다.
(1) 거칠현동(居七賢洞)
남창 동남쪽에 있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의 창업을 반대하면서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하며 지조를 지킨 신하 72명 가운데 7명의 신하가 이곳으로 와서 고사리를 캐어 먹으며 은거하자 후세 사람들이 그들의 불사이군 충절을 기려 마을 이름을 거칠현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들이 한시로 율창(律唱)으로 읊던 가사가 정선아리랑의 기원이라고 전해졌으며, 이곳을 정선아리랑의 발상지라고 이야기한다. 정선아리랑제기 열릴 때면 개막식에 앞서 칠현사에서 제래를 지내고 있다.
(2) 건개(乾漑)
남창 마을 앞으로 흐르는 냇물을 뜻하나 지금은 냇물 이름 보다는 거칠현동 바로 아래 마을을 부르는 명칭으로 주로 쓰인다. 지장천 상류에서 물이 흘러내려도 홍수 때를 제외하고 상류에서 물이 땅 속으로 스며들어 이곳이 냇물이 말랐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3) 남창(南倉)
선평역 동북쪽 남창분교 주변 마을이다. 조선시대 당시 남면 지역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 균세(均稅)를 징수하여 보관하던 남창(南倉)인 서운창(瑞雲倉)이 있었던 곳이므로 '창터', '창마을', '창말'이라고도 한다. 남창 마을은 예전에는 '수발'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양짓마을'이라고도 했으나 지금은 '선평'이라는 이름 속에 포함된 지명으로 불린다.
(4) 갬들(蟻坪)
남창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관동읍지, 정선총쇄록에 실린 지도에의 의평(蟻坪)으로 나와 있다. 그 후 '의평'은 '갬들'로 불렸고 지금은 '개미들'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지명에 얽힌 전설이 있다. 조선시대 광해군 말기에 신일민(辛逸民)공이 관직을 사임하고 이 마을에 은거 중 여름날 나무그늘에 개미가 모여들어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녹음방안도의평(綠陰芳岸都蟻坪)' 이라고 즉석에서 시 한 수를 지어 읊자 개미떼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때부터 이곳을 갬들(蟻坪)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5) 맷둔
갬들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절경으로 깍아 세운 것 같은 산자락 아래에 있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매'는 '뫼(山)'을 뜻하는 말이 변한 것이고 '둔(屯)'은 '둠'에서 온 말로 '둔지'를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맷둔'은 산골짜기 안의 둔지를 일컫는 말이다.
(6) 뒷내(後川)
맷둔 남쪽 낙동분교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북쪽에 시냇물이 휘돌아간다고 해서 '뒷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7) 음지마을(陰地村)
학바우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영곡으로 가는 포장도로가 갈라지는 곳에 있는 마을로 마을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어 해를 등지는 곳이라고 해서 '음지마을'이라고 한다.
(8) 샘들(泉坪)
갬들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중심부에 맑은 샘이 솟는 곳이 두 군데가 있어서 샘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한 곳은 지금 태백수산<선평 양어장>이 되었고 하나는 낙동2리 주민 식수원과 빨래터로 사용되기도 했다. 1911년에 펴낸 <조선지지자료>에도 지명이 '천평지(泉坪池)'이며 우리말로 '샘들못'이라고 부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그러나 천평이라는 지명의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9) 선평(仙坪)
선평역 주변의 음달마을과 남창 주변의 창말을 통칭하는 지명이다. 현재 낙동1리에 해당하는 지명으로 '선들'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생겨난 지명이지만 주민들은 낙동 1리와 3리를 통틀어 '선평'이라고 부른다.
(1) 수령(首領)
영곡 서쪽 터골재와 덥내산, 수리봉에 둘러싸인 마을로 골짜기 안에 25만여 평의 넓은 땅이 광활하게 펼쳐져있다. 수령은 현재 마을 이름을 뜻하나 일제강점기와 1950년대까지 현재의 수령마을은 '초두평(草頭坪)'에 딸린 '수령리(首嶺里)'였고 '수령(首嶺)'은 '머리재'를 뜻하는 고개 지명이었다.
(2) 영곡(靈谷)
수령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지지자료>에는 화암리(禾岩里)에 딸린 마을로 한자 지명은 '永谷'이지만 우리말로는 '영골'로 부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영골'은 멀고도 긴 골짜기, 또는 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으로 '길 영(永)'자를 써 '永谷'이라 했으나 지금은 '신령 영(靈)'자를 써서 '靈谷'이라고 쓴다.
(3) 채운(彩雲)
수아우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여름이면 안개가 자주 끼어있어 하늘과 땅을 구별하기가 어렵지만, 일단 해가 뜨면 안개가 걷힐 때 햇빛에 사라지는 안개가 오색 빛을 띠며 황홀하여 '채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4) 광방(廣坊) (너배이)
마차재 정상 북쪽에 신동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본래 웅동리에 속해 있었으나 신동읍과 남면의 경계를 마차재로 설정하면서 광덕리에 편입되었다. 오래전부터 광방을 '너배이'나 '너비'라고 부른다. 너배이를 '너른 골짜기 안'이라는 뜻으로 보고 이를 한자로 쓸 때 '넓은'의 뜻을 갖는 '너'를 '넓을 廣'으로 쓰고 '방'은 음대로 '坊'으로 써서 '廣坊'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광방리(廣坊里)였다.
(5) 광탄(廣灘) (너븐여울)
마을 앞으로 흐르는 지장천이 넓게 흐르는 곳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해서 너븐여울이라고 했는데 이를 한자로 써 넓을 광 여울 탄자를 취했다. 마을 한 가운데로 지장천이 흐르고, 지장천을 사이에 두고 양지마을과 음지마을로 갈라져 있다.
(6) 송오리(松五里)
광탄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 송악봉이라는 산이 있어 그 첫 글자를 따고 오리라는 오자를 따서 송오리라 칭했다고 한다. 또 다섯 그루의 노송이 있어서 오송백이라고도 한다. 이 소나무는 조선조 때 이정표로 오리마다 표송을 세워 보존하려 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문헌상으로 보면 송오리의 한문 표기는 '松五里'가 아니라 '松梧里'가 맞다. <관동지>, <관동읍지>, <정선총쇄록>, <정선지도>등 대부분의 고문헌에는 '소나무와 오동나무'의 뜻인 '松梧'라고 나와 있다.
(7) 서마루(三宗)
마등산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등산 뒤의 마을로 '평온한 산마루 마을'이라고 해서 생겨난 이름으로 옛 문헌에는 '평온한 산마루'라는 의미를 담은 서지(徐旨)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이 마을에 산마루를 이루는 고개가 올창골, 쇠골, 점골등 3곳의 능선이라고 하여 세마루를 서마루로 불렀다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서마루' 또는 '져마루'라고 불렀는데, 서마루의 '서'를 '셋'이라는 의미로 보아 삼종(三宗)이라고 했다.
(8) 갈금(葛金)
서마루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사람들은 갈금 일대를 쇠골이라고 한다. 쇠골 남산에 철 광맥이 칡넝쿨처럼 뻗어 있어 '갈금'이라 했다고 하는 얘기는 '쇠골'과 '갈금'을 '철'과 '금'등의 금속을 연상해 유추한 해석이다.
(9) 역밭(驛田)
광탄 서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에 역(驛)에 속한 밭이 있었다고 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역밭은 가수리 강변으로 도로가 뚫리기 전까지 가수리 주민들이 기차를 타기 위해 남면 선평 등지로 걸어 다니는 길목이었다.
(10) 웃범소
마을 앞 강변의 산세가 험해서 호랑이가 이곳에 이르면 갈 곳을 찾기가 어려워 당황하다 물에 빠져 죽는다 해서 범소라 했다.
(11) 수아우(禾岩)
석대 남쪽 골짜기 안 깊은 곳에 있는 마을이다. 일설에는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고 해서 '수와우(首臥牛)'라고 했다는 얘기가 전해오지만 '수아'라는 말은 '벼'를 의미하는 말로 수화(水禾)로 표기하거나 그냥 화(禾)로 표기하기도 한다. 한자로 쓰면서 '화암(禾岩)'이라고 한다.
(12) 돌티미(石帶)
수아우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을 이룬 곳이 암반 위이고 농토는 경사를 이루고 있다. 옛날부터 돌이 많이 쌓여있는 곳이라고 하여 '돌더미'라는 뜻으로 '돌티미', 또는 '돌터미'라고 불렀는데, 이 말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석대(石帶)'하고 한다.
(13) 승전말등(승지말등)
광탄 마을 뒤의 평평한 산을 말한다. 일설에는 옛날 임진왜란 당시 전쟁에서 싸워 이긴 곳이라고 해서 '승전말등' 또는 '승지말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