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말에는 동중 또는 동상면으로 불리우다 1909년 동면으로 개칭하고 27개리를 관할하였음. 1912년 군, 면 통폐합시 10개리로 개편하면서 호촌리에 있던 면사무소를 지금의 화암리로 이전함. 1962년 석탄산업 활성화로 인구가 급증하자 사북, 고한을 관할하는 사북출장소가 설치됨. 1973년 사북출장소는 사북읍으로 승격되면서 분리되었고 행정구역은 법정리 7개, 행정리 13개, 49개 반으로 운영됨. 그 후 2009.5.1. 단순히 방향으로 명칭을 정한 동면(東面)에서 주변이 기암절벽으로 둘러 쌓여 마치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하여 그림바위라는 지역 특색에 맞는 새로운 이름인 화암면(畵岩面)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가. 석곡 1리
(1) 억실(億實) : 석곡 1리 중심마을로 억곡(億谷)이라고도 함. 토지가 비옥하여 곡식과 과일이 풍부하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2) 뒤뜰(後坪) : 억실 북쪽에 있는 마을로 억실에서 산자락을 돌아 뒤쪽에 있는 큰 들판이라고 해서 후평(後坪) 즉 뒤뜰이라고 한다.
(3) 덕거리(德巨里) : 옛날부터 사방으로 통하는 큰 길목이라고 해서 덕거리라고 하며, 사투리로 뎃거리라고도 한다.
(4) 수리골(水流洞) :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연중 깨끗한 물이 흐른다 하여 수리골이라고 부른 것이 변해 수류골로 되었다고 한다. ‘수리’는 ‘산마루’나 ‘사이(間)’를 뜻하는 말이다.
(5) 가리미(駕里美) : 덕거리에서 수리골을 향해 올라가다가 오른쪽으로 난 골짜기로 가래메 또는 가리매라고도 함 ‘가래’나 ‘가리’는 ‘내(川)를 뜻하는 ‘갈’변해서 생긴 말이다
(6) 보리산(麥山) : 수리골 동쪽에 있는 산으로 남면 쇄재 동쪽 애(崖)리 협곡에 있다.
(7) 피목(皮木) : 피나무가 많아서 생긴 지명이라고 하기도 하나 ‘피’는 ‘비탈’을 뜻하는 말로 비탈 목에 형성된 마을이라 해서 불리워진 것이 더 유력하다.
(8) 마덕(馬德) : 마을이 크고 지형지세가 말(馬)형국이어서 마덕이라고 했다.
(9) 두리곡 : 마을 골짜기 안의 산세가 넓고 두루뭉술하다고 해서 두리골이라고 한다.
나. 석곡 2리
(1) 돌목(石項) : 정선읍 덕우리와 인접한 화암면의 관문으로 기암절벽이 금강산을 옮겨다 놓은 듯 아름다운 자연석으로 된 석문(石門)이 있어 돌목이라 칭하였다.
(2) 배지름골(陽貪谷) : 골짜기가 깊어 칼로 베어 질러 놓은 것과 같다고 해서 또 햇볕이 잘 들지 않아 햇빛이 아쉽고 그립다 하여 ‘베지른골’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일명 양빈골(陽貧谷)이라 한다.
(3) 후면(後面) : 돌목 뒤에 있던 마을로 도로변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뒷마을이라고 해서 후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4) 장승백이(將丞) : 마을입구인 효자각이 있는 곳 근처 길평에 오래전 장승을 세워 마을의 재앙을 막고 이정표로 사용하였다 하여 장승백이 또는 장승배기라고 한다.
(5) 거미대(巨美台) : 마을 앞으로 수정같이 맑은 냇물이 흐르고 그 옆 병풍 같은 기암절벽위에 거미대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6) 음지마을(陰地村) : 마을 앞뒤(동남방) 산이 높고 산림이 울창하여 부른 지명이다.
(7) 빈지내(賓去來) : 옛날 이곳에서 나는 고령토의 질이 좋아 기와를 굽던 곳이 있었다고 하며 거미대와 방평(芳坪)마을 하천 건너편 길가에 있는 마을로 길손이 왕래한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8) 방평(芳坪) : 제방 옆의 둔덕 마을이라고 해서 ‘방두덕’이라고 한 말이 변해 ‘방두둑이’가 되었으며 한자로 표기하면서 방평(芳坪)이라고 했다.
(9) 맨밭들 : 비암사 강 건너 쪽에 있는 밭을 일컫는 말로 땅이 거칠어 밭농사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메마른 밭이라는 뜻이다.
(1) 상북동(上北洞) : 북동리의 중심마을로 ‘윗마을’이라 하여 상북동이라 하며 1920년대 금광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이곳에 양조장과 음식점이 들어서고 시장이 섰다고 해서 ‘제자거리’라고도 하였다. ‘제자’는 ‘시장’이나 ‘물건을 파는 가게’,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반찬거리를 파는 작은 규모의 시장’을 뜻하는 ‘저자’의 사투리이다.
(2) 무낼(水出) : 북동 계곡천의 발원지라 하여 ‘무내리’ 또는 ‘무낼’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름으로 한자로 쓰면서 수출동(水出洞)이라 불렀다.
(3) 뒷골(後谷) : 상북동에서 약3㎞ 거리에 있는 뒷골짜기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 달애골(月愛谷) : 뒷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임계면 반천으로 넘어가는 다래재(달애재) 밑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지명이다.
(5) 하북동(下北洞) : 정선읍 덕산기와 인접한 곳으로 북동에서 아랫마을이라 하여 하북동이라 칭하였다.
(6) 함바위(白岩洞) : 고양산(高陽山) 아래 흰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백암동이라 하였다.
(7) 재미골 : 하북동에서 북쪽으로 함바우를 향해 올라가다가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로 승두재와 다래재 아래로 난 골짜기여서 ‘재밑골’이라고 했는데 이말이 변해 ‘재미골’이 되었다.
가. 화암1리
(1) 아래 그림바위(下畵岩) : 마을 주변이 거북바위, 용마소, 맷돌바위 등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자연경관이 한 폭의 동양화 같다고 하여 그림바위라 하였다.
(2) 위 그림바위(上畵岩) : 아래 그림바위에서 위쪽에 있는 마을로 화표주(華表柱)와 소금강(小金剛)을 옆에 끼고 신선바위(神仙岩), 장기바위 등 주위가 그림 같은 마을이다.
(3) 원터(院基) : 현재 화암약수가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관원(官員)들이 유숙할 수 있는 일종의 국영여관(國營旅館) 숙박시설이 있던 곳이라 하여 원터라 하였다.
(4) 구슬동(九瑟洞) : 옛날에 비파를 가진 일곱명의 선녀가 이곳에 내려와 목욕을 하고 놀 때 신선바위에서 장기를 두던 태백산 신령과 오대산 신령이 비파소리에 현혹되어 이곳에 찾아와 아홉명이 날이 새도록 가무를 즐기며 함께 놀았다고 해서 구슬동(九瑟洞)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5) 샛골(間村) : 큰 구슬동과 작은 구슬동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사잇골로 부른것이 변해 ‘샛골’ 또는 새골이라고 했다.
(6) 금지기골(金織洞) : 옛날 골짜기 안에 금직광산(金織鑛山)이라는 금광이 있었다고 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나. 화암 2리
(1) 싸내(米川) : 마을 앞으로 흐르는 동천 냇물을 이용해 논농사를 짓던 곳으로 미곡이 생산되는 곳이라 하여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
(2) 천포(泉浦) : 각희산 골짜기에서 흐르는 샘물이 사계절 끊임없이 흐른다고 해서 천포라고 불렀다. 예전에는 ‘샘골’이라 부르기도 했다.
(3) 솔무덕(松亭) : 마을 주변으로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고 해서 ‘솔무더기’라 부르게 되었다 이말이 ‘솔무덕’, ‘솔무데기’가 되었다고 한다.
(4) 점불(点佛) : 쇠를 녹여 호미나 낫, 부지깽이 등을 만들던 점부리가 살았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다. 화암 3리
(1) 오산(鰲山) : 마을의 형국이 커다란 자라 같다고 하여 오산이라 불렀다.
(2) 좌사(坐沙) : 화암에서 정선방향으로 흐르는 어천(魚川)이 동네 중앙으로 흐르면서 모래토양이 많이 쌓여서 좌사라 칭하게 되었다.
라. 화암 4리
(1) 화표동(華表洞) : 마을 입구에 화표주(華表柱)라 하는 100m 가량 우뚝 솟은 자연석 바위가 있어 화표동이라 하였다.
(2) 큰터(大基) : 화암4리의 중심마을로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이 넓다고 해서 ‘큰터’라고 한다.
(3) 절골(寺谷) : 옛날 절이 있었다고 해서 절골이라고 한다.
(4) 후원(後園) : 큰터 뒤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5) 활개(弓甫) : 화암4리 화표동에서 임계면 덕암리로 넘어가는 고개 밑 마을로 계곡 아래로 흐르는 하천이 활과 같이 굽었다하여 활개라 부른다.
가. 몰운1리
(1) 한치(汗峙) : 옛날 동창(東倉)이 있던 곳으로 도로가 개설되기 전 몰운으로 넘어가는 ‘창재’가 있었는데 등짐을 지고 고개를 넘다가 보면 땀이 난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2) 뒈기골(後基谷) : 화암리와 몰운리의 경계 안쪽에 있는 마을로 한치 뒷산을 넘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뒈기골이라 하였다.
(3) 설암(雪岩) : 전후좌우에 기묘한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석회암 절벽으로 평소에도 눈덮인 모양으로 희뿌옇게 보여 설암이라 칭하였다.
(4) 들미골(덜미골) : 한치부락 언덕(서북쪽) 뒤에 있는 계곡으로 된 마을이라고 하여 돌미골이라 한다.
(5) 직골 : 한지에서 몰운으로 가는 창재 무렵에서 북동쪽 광대산으로 난 골짜기로 골짜기기 곧바르게 뻗어 있어 ‘직골’이라고 한다.
(6) 샛둔지 : 들미골 아래쪽 골짜기 사이로 새롭게 밭을 일군 넓은 농경지인 둔지(屯地)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 몰운2리
(1) 몰운(沒雲) : 아름다운 절경이 있는 몰운대 아래에 있는 마을로 몰운대는 항시 구름이 머물러 있음으로 몰운대라 칭하였다.
(2) 광대곡(廣大谷) : 험준한 계곡과 석벽이 기묘한 장관을 이룬 곳으로 하늘과 구름과 땅이 붙은 듯 어우러진 신비한 계곡으로 이곳에 부정한 음식을 먹고 입산하면 모든 나뭇가지가 뱀으로 보이고 계곡에서 몸을 다치는 일이 허다하다고 한다.
(3) 버들골(柳谷) : 몰운에서 건천(乾川)으로 넘어가는 길옆의 골짜기로 버드나무가 많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4) 제동(猪洞) : 윗 제동, 아랫 제동 두 골로 형성된 마을이며 멧돼지가 많이 있었다하여 제동이라 하였다.
(5) 각희골 : 몰운에서 남면 능전으로 넘어가는 각희재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1) 본동(本洞) : 건천리에서 가장 큰마을이라 하여 본마을(本洞)이라 한다.
(2) 큰벌(大坪) : 고원지대 큰 벌판으로 이루어졌다하여 부르게 된 곳이다.
(3) 소일(素日) : ‘사이’를 뜻하는 ‘새’가 ‘소’로 음이 옮겨간 말로 ‘소일’은 ‘골짜기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4) 손이골 : 건천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건천에서 화표동과 임계면 덕암리와 삼척시 공전으로 넘는 손이재 아래에 있다 하여 손이골이라 함. 포수들이 쓰는 용어인 손이는 호랑이나 큰 짐승를 잡는 덫의 하나로 ‘손우’라고도 한다.
(5) 장아리(裝阿里) : 큰벌 서쪽에 있던 마을.
(1) 풍촌(豊村) : 마을 중앙에 삼봉(三峰)과 마산(馬山)이라 부르는 봉이 있고 농경지가 넓고 평탄하며 토질이 비옥하여 옛날부터 농사가 잘 되어 풍촌이라 하였다.
(2) 어우슬(於牛膝) : 풍촌 마산 건너편 골짜기 화전민촌으로 쟁기로 밭을 갈면 비탈밭(傾斜田)이라 소의 무릎이 땅에 닿는다하여 어우슬이라 칭하였다.
(3) 호명(虎鳴) : 옛날에 산림이 무성하여 대낮에도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울었다하여 호명이라 하였다.
(4) 감재(甘峙) : 직전리 수출동(水出洞)과 인접한 곳으로 이곳에서 백전(栢田)으로 가는 고갯길이 감재라 하여 마을 지명도 같이 불렀다고 한다. ‘감’은 ‘크다’는 뜻이다.
(5) 옥운이골(玉雲洞) : 호촌과 백전 경계지역에서 남쪽으로 길고 좁은 골짜기로 봄과 여름철 떠다니는 구름이 구슬같이 희고 아름답다하여 옥운곡(玉雲谷)으로 칭하였다.
가. 백전1리
(1) 서원기(書院基) : 조선시대 서원이 있던 마을이라고 하며 이곳에서 한학을 가르쳤다고 하여 서원기라 한다.
(2) 대지산(大支山) : 백전리에서 가장 넓은 경지가 있는 곳으로 옛날 큰밭(大田)으로 부르던 뒷산이 대지산이라 하였다.
(3) 정승골(丞相谷) :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고려말엽 추정) 전란을 피해 온 정승이 숨어 들어 살았던 골짜기라고 해서 정승골이라고 부른다.
(4) 평밭거리 : 서원기에서 합수거리 중간의 하천 변 양지바른 곳으로 농사짓기에 평탄한 밭이 형성된 곳이라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5) 합수(合水)거리 : 삼척군 하장면 둔전리에서 흐르는 물과 삼척시 대덕산에서 백전리로 흐르는 물이 합류하는 지점이라 하여 칭하여진 이름이다.
나. 백전2리
(1) 한소리(汗沼洞) : 용소(龍沼)가 있어 ‘큰 소(沼)’라는 뜻으로 ‘한소’, ‘한리소(汗里沼)라고 했는데, 이말이 변해 ‘한소리(汗沼里)’가 되었다.
(2) 노나무골(櫓木洞) : 백전리에서 사북읍으로 넘어가는 노나무재 아래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마을의 재앙을 물리친다고 해 매년 정월 대보름날 붉은색을 칠한 큰 나무 기둥 꼭대기에 오리모양을 깎아 얹어 세우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것을 노대라 하며 이런 풍습이 성행하였다하여 마을명을 노나무골이라 칭하였다.
(3) 마당목(場項) : 백전리와 사북읍 북일동(北日洞) 접경이며 백전리의 제일 끝 마을로 700~800m 고지에 넓은 밭이 펼쳐져 있다고 해서 마당목(場項)이라 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