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군 북쪽에 위치하여 있으며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다. 동으로 여량면 서로 정선읍, 평창군 진부면에 각각 인접하고 있다.
북으로 상원산(해발 1,421m)과 서쪽으로 가리왕산(해발1,560m) 등 큰산이 둘러싸여 있으며 농경지는 평탄하다.
본면은 고려시대(1018년)부터 42년간 주진(朱陳) 고을 소재지였고, 조선시대에 지금의 북평리를 도원-원창골 등으로 부르다가 근래에 후평(뒤뜰)-북평리로 불리어 졌으며, 일제시대엔 행정구역이 북면에 속해 있었고 면사무소 위치도 현 제재소 기와집이었으나 이후 여량으로 면사무소가 옮겨갔다. 1915년 4월에 면사무소를 남평으로 이전하였다가 1944년에 북면 여량으로 이축했다. 1963년부터 관내 6개 리를 관장하는 북면 남평출장소를 설치 운영하다가 1980년도 출장소를 북평으로 하였으며 1986년 4월 1일 북평면으로 승격 법정6개 리, 행정15개 리, 자연부락 31개 부락을 관장하게 되었다.
(1) 장열(長悅)
이 마을은 장열리 소재지다. 장열부락 구도로 꽃베루에서 내려다보면 남북으로 길게 집단 마을을 이루고 있기에 길다는 긴 장(長)자와 늘 마을 주민은 즐겁게 산다고 즐거울 열(悅)자를 합쳐서 장열리라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2) 동하치(冬夏峙)
이 마을 뒷산 썰매길로 약 1㎞ 옛 국도로(꽃베루) 올라가다 보면 얼음굴이 있다.
삼복(三伏)때가 되면 동굴에서 얼음덩이가 얼어서 나온다. 외기 온도가 높을수록 더 크게 언다. 그러다가 처서(處暑)때가 되면 서서히 얼음이 없어진다.
(3) 가평(柯坪)
이 마을은 장열리 본 부락 철교 건너 철도와 국도 변을 따라 비옥한 밭이 길게 펼쳐져 있다. 그래서 장열리가 더 길고 평탄해 보인다해서 가평(加坪)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속칭「가드루」라고도 하는데 갈나무가 무성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4) 곧베루(꽃베루 : 花峴)
정선아리랑 가사에 아질 아질 곧베루 지루하다 성마령 지옥 같은 이 정선을 누굴 따라 여기 왔나 정선땅 가도가도 끝이 없는 곧베루 지루함을 달래느라고 부른 노래가 남아 있다. 곧베루 길은 산기슭과 벼랑이란 뜻이다. 곧베루 길은 1960년도만 해도 정선―강릉간 국도였다. 교통사고도 많이 난 곳이다.
(5) 산제골(山祭谷)
북평저수지 위 여울에서 왼쪽편 고을인데 무속들이 산제를 올렸다 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6) 나무절골
연대 미상이나 손참봉(孫參奉)댁에 칠성당을 모시고 축원을 하여 득남을 하였다고 하여 절골이라고 칭하였다.
(7) 상투베리
북평면과 북면으로 통행하는 곳의 벼량이 옥갑산 능선을 이루어 통행이 불편한데 상투모양의 돌이 2개가 있어 왕래하는 사람은 상투를 잡고 넘었다 하여 불리게 된 지명이다.
(8) 뱃골(梨谷)
장열리 강 건너 쪽 구 꽃베루에 있는 골인데 돌배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해서 배나무골이다.
(9) 통수골
장열리에서 동쪽으로 난 골짜기이다
옛날부터 장마가 지면 골짜기에서 큰 물이 내려 쏘듯 내려온다고 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통시골로도 불리며 이 골짜기를 따라 바람부리 쉼터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으며통수골 아래에는 저수보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10) 부엉이굴
산제골로 올라가다가 위쪽에 있는 넓고 평평한 땅이다. 갈나무가 많은 평평한 땅이라서 갈번지라고 한다. ‘번지’는 ‘번디’에서 온 말로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룬 산상평지를 뜻하는 말이다. 장열마을 위쪽 조양강변 자갈밭을 말한다.
(11) 얼음굴
장열마을에서 광대비리 남쪽에 있는 굴이다. 꽃베루길 산 사면에 있는 굴로 여름에 굴 안쪽에 얼음이 언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입구가 어른이 겨우 기어 들어갈 정도의 크기인 이 굴에는 월 중순경부터 얼음이 얼기 시작해 삼복 때가 되면 절정을 이루다가 처서가 되면 서서히 녹아 없어진다.
(12) 꽃밭재
얼음굴 일대 산으로 예전에 돌무더기 곳곳에 진달래가 많이 피어 생긴 이름이다.
(13) 소가리광장
장열마을 위쪽 조양강변 자갈밭을 말한다. 가드루 앞을 흘러내려온 조양강이 감입곡류하면서 형성된 강변으로 강에서 쏘가리가 많이 잡히는 곳이라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14) 옥녀봉
가드루마을 북동쪽에 있는 산이다. 산의 형국이 옥녀가 머리를 풀어헤친 옥녀산발형이어서 생긴 지명이다. 옥녀봉은 산세가 기묘하고 부근에 묘가 많아 예로부터 명당지라고 한다.
(15) 하남골
가드루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강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겨난 지명이다. ‘한남골’이라고도 하는 이곳 일대에는 산림청 육종묘장이 설치되어 있다.
(16) 갈번지
산제골로 올라가다가 위쪽에 있는 넓고 평평한 땅이다. 갈나무가 많은 평평한 땅이라서 갈번지라고 한다. ‘번지’는 ‘번디’에서 온 말로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룬 산상평지를 뜻하는 말이다. 장열마을 위쪽 조양강변 자갈밭을 말한다.
(1) 북평(北坪)
본리의 소재지로서 고려 때는 군 소재지로, 조선 중엽에는 면 소재로 발전을 해왔다. 정선군의 북쪽에 있는 넓은 들판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본마을은 상, 하동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곳에는 북평 8경의 명승이 있고, 금돼지(金豚) 전설이 있다. 마을 앞 나루터 부근에 동굴(洞窟)이 있는데 옛날 이 굴속에서 미사리(몸에 털이 나고 옷을 입지 않은 괴인)라는 괴물이 자주 나와 민가의 부녀자들을 납치해 갔다는 전설이 있다.
(2) 항동(項洞)
백석봉(1,170m)과 상원산(1,421m) 계곡에서 흐르는 한곡 계곡에 찬물이 흐른다 해「항골」로 부르게 되었는데 깊숙한「내항골」도 있다.
(3) 강선암(降仙唵)
정선군 고한리 정암사(갈래절)에서 오대산 월정사로 왕래하던 길인데 스님들이 이곳에 숙식하고 다니던 암자가 있었다. 이곳에 신선이 내려온 암자였다고 한다.
(4) 석두(石頭)
백석봉(白石峰) 밑에 석두에 절이 있었는데 그 절터만 있고 경내에 있는 5층탑은 15년 전 도난 당했다. 현재는 그 자리에 묘가 있을 뿐 탑신과 기초석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고 석가여래상도 파괴되어 흩어져 있다.
이곳에 큰 바위가 사람머리 같이 생겼다하여「석두」라 하였다. 석탑은 고려 때 승려들이 2년간에 걸쳐 직접 건축한 탑이다.
(5) 검은소
숙암으로 가는 도로 강 건너「석두」밑 오대천 강변 암석이 검은 색으로 강바닥이 검게 보인다해서 검은소라고도 하고 물이 깊어 검푸르게 보여서인지「검은소」또는 일명「거무소」라고도 부른다.
(6) 붉은 언덕
점토(粘土) 흙으로 된 언덕인데 옛날에는 주택 건축 시 붉은 찰흙으로 벽체를 해야만 액귀를 쫓는다하여 이곳의 흙을 파서 사용했고 그로 인하여 언덕이 되었다하여 붉은 언덕 벽이라고 한다.
(7) 노루목
상원산과 백석봉 능선이 서로 만나는 능선인데 흡사 노루의 목과 같이 계곡이 갑자기 짤록하게 좁아지는 고개인데 노루가 이동할 때 이곳 목(項)을 꼭 통과하는 곳으로써 도처의 사냥꾼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지형도 노루목 같이 생겼고, 또한 노루도 많이 서식하는 곳이라 하여「노루목」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8) 먼골
북평 본동에서 평창군 진부를 왕래하는 깊은 계곡인데 아주 멀다해서「먼곡」이라 했다. 옛날에는 집이 띄엄띄엄 있었는데 지금은 무인지경이다. 다만 약초 캐는 사람들만 다닐 뿐이다.
(9) 차랑골
북평리 본동에서 12㎞ 평창군 진부면쪽의 골인데 노루목을 넘고 먼골 넘다보니 하도 지루해서 행인에게 길을 물으니 또 한번 골을 지나야 된다하여 또 한차례 넘어야 되는 계곡이냐는 뜻에서 차랑골이라 했다한다.
(10) 아차골(我差谷)
본리 소재지에서 0.5㎞ 지점인데 항동(項洞)에서 갈라진 좌측골이다. 이 골은 메밀이 잘되어 어떤 농부가 메밀을 풀러 메밀 재를 지고 가다가 담배 한 대 피우려 지게를 벗어 놓고 담뱃주머니를 찾으니 주머니를 집에 두고 온 것이 생각이나 아차 ! 담배주머니를 잊었구나 ! 집에 내려와 담배를 가지고 다시 갔다고 하는 골이라 하여「아차골」이다.
(11) 벌래골(潘內谷)
이곳은 석탄을 캐던 곳이다. 옛날에 반씨(潘氏)가 살았던 골이라고 하여「반내곡」이라 하였는데 속칭 벌래골이라 부른다.
(12) 약물골
한골로 들어가 강선암 밑 마을인데 한골계 벼랑에 나오는 약수(藥水)는 피부병 위장병 등에 효험이 있다. 그리고 시원하고 조용한 곳이기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날로 늘고 있다.
이 약수를「한골약수」라 하여「약물골」로 부른다.
(13) 밀운이(麥雲洞 : 미루니)
본 리에서 서쪽 검은소 뒷산 중턱에 위치한 약 1㎞지점에 있는데 양지바른 곳이기에 밀, 보리, 메밀을 많이 심는 곳이다. 이곳 산허리 안개구름이 늘 떠돈다. 그래서 밀, 보리밭 위에 뜬구름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다하여 붙여진「밀운이」이름이라고 한다.
(14) 두리봉
붉은 언덕 서쪽에 있는 산이다. 난향산 왼쪽에 있는 산으로 정상 봉우리 부분이 두루뭉술하다고 해서 ‘두리봉’이라고 한다.
(15) 호랑바우
두리봉 남쪽 능선에 있는 바위다. 숲에 가려 겨울을 제외하곤 잘 보이지 않으나 옛날 호랑이가 나타나 바위에 올라 앉아 있곤 해서 ‘호랑바우’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호랑이가 자고 간 표시가 지금도 남아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16) 양지마을
42번 국도에서 항골계곡으로 들어서면서 오른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남향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가 드는 곳이어서 ‘양지마을’이라고 한다.
(1) 장승배기
장승백은 현 남평리 조사료공장 자리에 장승을 세웠던 곳으로「장승배기」라 하였으며 이곳에 광대벼루의 유래가 있는데 옛 도백이나 높은 벼슬자리에 있던 분이 올 때 지금의 악대와 같은 광대들을 불러모아 환영하는 행사를 하였다는 곳이라고 전해 오고 있다.
(2) 다슬(복지곡)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이 행차할 때 평민들이 그 곳 양 길가에 행차가 지나갈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했다하여 복지곡(伏地谷)으로 부르나 북과 악기 소리가 요란하다 하여 다슬(多瑟)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3) 새마을
이 지역 주민의 조상 대대로 숙원사업이 남평나루터 교량 가설인데 1976년도「남평 교량가설 협동권 사업추진위원회」주관 하에 온 마을 주민이 협동 단결하여 3차 년에 걸쳐 길이 170m, 높이 8m, 넓이 6.5m 이룩하였고, 46㏊ 황무지 개간 등 각종 부대 사업의 목표를 달성한바 후손들에게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새마을 사업으로 부락이 형성되어 새마을이라 한다.
(4) 봉화치(烽火峙)
구 국도 변 속칭 꽃베루 가는 길 우측 산 정상에 위치한 마을인데 봉화치 정상에는 옛날 통신(通信) 수단으로 사용하던 봉수형대(烽燧炯坮)가 설치되어 있던 곳이다.
이 봉수대는 국가변란이 있을 때에는 봉화를 올려 암호통신의 역할을 했을 정도이다. 이 봉화의 통신수단이 없어진 것은 1884년(고종 21년)3월에 우전총국을 개설하고 우정사무를 개시한 때부터였다. 정선군 우편소는 1914년 8월 1일 개국되었다.
(5) 한대골(寒垈谷)
이 골은 봉화치와 남산 골짜기와 북평에서 부는 바람이 세차고 차가워서 한대골이라고 붙인 이름이다. 이곳에는 옹기를 구워내던 곳이기도 하다.
(6) 새을동(塞乙洞)
남산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맑고 차가운데 본동(梧村)중심부로 흘러 대소 폭포를 이루어 그 물소리를 달밤에 들으면 선인(仙人)이 시를 읊는 합주곡 같이 들린다. 이 골이 흡사 새을 자(乙)같이 생긴데다가 물이 너무 차갑다고 해서 새을동(塞乙洞)이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7) 오음봉(五音峰)
동리 한 가운데 솟은 산봉은 그 형상이 훌쩍 내려앉은 鳳凰같으며 그 상봉에 이르면 장열리, 북평리, 나전리등 마을이 한눈에 보이며 임계천, 오대천이 눈 아래로 굽어보인다 하며 일명 남평리 5개 부락의 소리가 들린다하여「오음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한다. 이곳에「지석묘」군 3기가 오음봉 아래 평야에 있다.
(8) 신촌(新村)
이 마을은 6.25사변 후 피난민에 의해 생긴 마을이다. 피난 온 사람들이 본 마을을 개척해서 마을을 형성했고 한때는 장이 서기도 했다. 황무지를 개간한 이곳 주민들의 정주(定住) 의식을 본받을 만 하다.
(9) 평둔소(坪屯沼)
평둔소는 북평나루로 가는 구 도로가 있는데 그 옆에 소(沼)가 있다. 도로변에는 방풍림 노송(老松)이 수백 주가 울창하게 있다. 임진왜란 시 왜병(倭兵)이 동리를 침입하였는데, 속설에 의하면 왜병은 송자(松字)가 있는 곳은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부근 소나무에 가죽 포대를 매달고 그 속에 들어가 잠자는 것을 변이홍(邊以洪) 장사가 왜병 10명을 포박하여 산밑에 있는 소에다 몰살시켰다는 소가 지금도 있다. 이 소를 평지의 물이 모여서 소를 이루었다하여「평둔소」라 하였다고 한다.
(10) 솔돌
남평리 일대를 부르는 지명이다
(11) 옥산소
새릿골어귀 남쪽에 있는 해발 567.1m의 산으로 ‘옥산수’라고도 한다. 나지막한 산으로 옛날 산 위에 물이 많이 나와 산 아래에 소를 이루었다고 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12) 새릿골(새을동)
옥산소 동쪽 새릿골 어귀에서 약 2km 위쪽 산에 있는 마을이다. ‘새리’는 ‘샐’을 어원으로 하고 있으며, 산 고개를 뜻하는 ‘사리’가 와전되어 ‘새리’가 되었다.
(13) 옴모테이(옴모탱이)
오음봉 남쪽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오음봉이 축약된 ‘옴’과 길이나 사물이 꺾어지는 부분을 뜻하는 ‘모퉁이’가 합쳐져 생긴 이름이다.
(14) 고갯마을
남평초등학교 위쪽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이 언덕진 곳에 위치해서 ‘고갯마을’이라고 한다. 고갯마을 일대는 남평리의 중심 마을로 면사무소 옛 건물이 남아있고, 1940년 8월 28일에 개교한 남평초등학교를 비롯해 정선군 농업기술센터 등이 들어서있다.
(15) 문화마을
신촌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현대식 시설을 갖춘 농촌 주택단지를 조성하기 위하여 1998년 조성이 확정되어 2000년 문화마을 주택건설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조성된 마을이다.
(16) 다싯마을(다슬마을)
한 대동 아래에서 남평초등학교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일설에는 북과 악기 소리가 요란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하나 ‘산촌’을 뜻하는 ‘닷(다)‘와 마을을 뜻하는 ’실‘이 ’다실‘로 변했고, 이 말이 와전되어 ’다싯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발행된 고지도와 문헌에는 ’다슬‘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 본동
본리의 소재지다. 서북으로 정선읍 덕송리 남으로 정선읍 여탄리, 동으로 북면 고양리와 인접하여 있는 곳인데 문곡나루로 다니는 길이 불편하던 중 1980년도에 잠수교 가설로 인하여 교통의 오지를 면했다. 이곳은 사양하여 농사가 잘되며 아담한 마을이다.
(2) 백운동(白雲洞)
이 마을은 배나무가 많이 있는 골이라 하여 일명「배나무골」이라고 하고 또는「배낭골」이라고도 한다. 이 골에 흰 안개구름이 항상 떠돈다하여 백운동으로 칭하게 되었다. 이곳 전설 한가지를 들어본다.
본 마을 소옥봉(小玉峰)은 갈마음수(渴馬飮水)형으로 계곡에 천연으로 생긴 돌구멍(말쭉통)이 막연하다고 전해오고 있다.
(3) 수무골(二十洞)
이 골은 북면 고양리(高養里) 수무골과 연결된 깊숙한 골인데 이 계곡에 20집이 살아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4) 소곡(小谷)
이 골은 적은골이란 뜻이다. 상정바위(1,006m) 능선 아래에 위치한 계곡 마을이다.
(5) 큰골
강물 따라 험준한 벼랑길로 정선읍 여탄리 중복동과 연결된 마을인데 상정바위에서 흐르는 계곡이 아름답다. 소곡에 비하여「큰골」이라는 뜻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1) 명주내(본동)
교통은 편리하다. 정선읍으로부터 8㎞ 면사무소로부터 2㎞ 떨어진 곳으로 입산 도로가 숙암리 경유 평창군 진부면으로 연결되었다. 이 도로는 주민 철수 작전도로 육군공병대 도로 공사를 부분적으로 하다가 지방도로 승격되어 확 포장하였다.
(2) 어도원(於桃源)
이 마을은 가리왕산 밑에 위치한 마을인데 봄에는 꽃이 만발하고 가을이면 단풍이 절경이어서 등산객들의 흥미를 돋아주고 있다. 해가 일찍 진다고 어둡다는 뜻으로「어두워서」라고 하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파난(避難)지나 혹은 은둔(隱遁)지를 도원(桃源)이라 한다. 그래서 어도원(於桃源)이라고 부른다.
(3) 장평(長坪)
이 마을은 일명「진드루」라고도 한다. 마을 형국이 긴 뜰이라는 뜻에서 장평(長坪)이라고 부른 지명이다. 이곳 토질은 사질 양토로 농사가 잘 되고 양묘(養苗)의 적지이다.
(4) 졸평(卒坪)
장평마을 오대천 건너 위치한 마을인데「졸드루」라고도 하나 졸평(卒坪)이라고 부르는 뜻은 장평에 속하여 있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5) 야미동(배미)
남평나루터 건너 민둔산(民屯山) 아래 마을로서 이곳에는「산골」이라는 것이 있는데 뼈대가 아플 때 먹는 골뱅이류와 흡사한 메밀알 같이 작은 조개 같은 것으로 봄으로 할머니들이 많이 찾아와 먹는 약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은 일명「할미꼴」이라고도 한다. 야미(野尾)로 표기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이 마을 상장암(上將岩)은 기구 절승하여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 여량면 고양리 상장바위와 모양이 신기하게도 꼭 같다.
(6) 거무소
졸드루 남쪽에 오대천 하류에 있는 소다. 북쪽 석두 산자락에 가려 강바닥이 검게 보인다고 해서 ‘검은소’라고 했는데, 이 말이 변해 ‘거무소’가 되었다.
(7) 암반대기
석회암 지형의 돌리네 현상으로 땅이 마치 너른 암반처럼 형성되었다고 해서 ‘암반덕’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변해 ‘암반대기’가 되었다. 국립지리원 발행 지도에는 ‘안만곡’으로 나와 있다.
(8) 진드루
본동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형국이 긴 들판을 이루고 있는 곳이라는 뜻에서 ‘긴들’이 ‘진들’로 변하고, 이 말이 다시 ‘긴드루’ 또는 ‘진드루’로 변했다.
(9) 졸드루(졸평)
장평마을 동쪽 오대천 건너에 위치한 마을이다. 작고 좁다는 뜻으 ‘졸’과 평지란 뜻의 ‘드루’란 말이 합쳐저 ‘졸두루’라고 하며, 이 말을 한자로 ‘졸평’이라고 부른다.
(10) 음달마을
문방아골에서 흐르는 도랑을 경계로 새물출이 옆 선장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민둥산 높은봉에 가려 일찍 그늘이 진다고 해서 ‘음달마을’이라고 한다.
(11) 다래골
가느드루 서쪽에 있는 골짜기다. 나전리와 숙암리 사이 국도에 바로 붙어있는 좁은 계곡으로 골짜기 안쪽으로 초여름 흰 꽃이 피었다가 가을에 황록색 열매가 달리는 다래나무가 많아 ‘다래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다래골’의 ‘다래’는 ‘좁은 산’이라는 뜻을 지닌 말로, ‘골’과 합쳐저 ‘달애골-다래골’이 되었다.
(1) 우면주(牛眠州)
이 마을 리 소재이며 (구)숙암초등학교가 있었다. 이곳 주민은 다수가 평안도 사람이 많다.「정감록」을 보고 피난지를 찾아왔다고 한다. 동학란 때 50여 호가 집단으로 왔다가 일부는 사북읍 도사곡으로 이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인지 이 지역 주민 식생활이 독특하다. 갓김치, 동침국수(냉면)를 즐겨 먹는다. 마을 앞 하천에는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누워 있는 정경과 지형이 소가 잠을 자는 형국이라는 뜻에 우면주라 이름하였다.
(2) 대기(大基)
일명 큰터라고 한다. 계룡잠 계곡에서 흐르는 소하천이 길게 흘러 오대천과 합치는 곳이다. 옛날부터 5~6집이 집단으로 이루어 생활한다고 하여 대기(큰터)로 불렀다고 하는데 이곳에는 논뱀(따락논)이 있어 그나마 부자가 살았다는 곳이다.
수백 년 전 대추나무가 많은 것을 보면 옛터임이 실감난다.
(3) 우전(友田 : 벗밭)
숙암리 우면주마을 강 건너 북평리 상원산쪽 계곡에 위치한 마을로 옛날에 우정이 두터운 사람들끼리 살았다는 마을이라 하여 우전(友田)이라 부르는데 속칭 벗밭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높은 터, 깊은 터로 구분되어 있다.
(4) 단임(丹林)
본 군 소재지에서 가장 깊은 골이다. 마을 온 산천이 단풍나무로 뒤덮였다고 해서 단림(丹林)이라고 붙인 이름이다. 이 마을을 웃단임, 아랫단임, 밭갓단임, 웃골, 아랫골 취락이 형성되어 있는 벽촌이다.
(5) 장재터(張財棋)
단임 마을에서부터 약 12㎞ 떨어진 첩첩 산중에 있는 곳인데 옛날 이름 모를 부자가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인지 단임골에 부자가 살았다하여 장재터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6) 오잠(烏岑)
가리왕산 중봉 8부 능선에 위치한 곳이다. 우면주 뒤 골짜기로 올라간다. 이곳에 옛날 몇 집 살았는데 그야말로 순수한 화전민 생활을 하였다.
(7) 내미구미
지금의 숙암주유소 뒤편에 강물이 굽이쳐 흘러 나가는 곳, 냇물이 굽이친다 하여 붙여진 곳인데 가리왕산 샘물터가 아래쪽에 있다.
(8) 절터
숙암 양어장 강 건너편 언덕에 절이 있었던 곳이다. 그래서 불리워진 지명이다.
(9) 소나무터
현 숙암초등학교를 지나 솔밭휴게소가 있는 곳을 옛날 초남터(樵南基)라고 했는데 지금은 소나무가 많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10) 용구렁이
나전 진부간 도로 솔밭휴게소를 지나 고개 마루 강 건너 옛날 도로가 개통되기 전에 벼랑길인데 용이 되려는 큰 구렁이가 지나갔다고 하는데 돌의 형태가 흡사 구렁이 같다고 하여 부른 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