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면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 때 9주로 확정, 명주군에 속하였다가 고려(1018년)때에는 강릉군에 속하였고 조선시대(1906년) 고종 43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임계면이 정선군에 이관되어 정선군 임계면이라 칭하게 되었다.
1910년 일제침략으로 면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11개 리이고, 1973년 7월 행정구역 개편, 삼척군 하장면 도전리와 가목리를 임계면에 편입, 13개 리였으나 1989년 1월 봉정리를 여량면으로 이관하여 현재 12개 리로 되어 있다.
(1) 가목(柯木)
가목리 서쪽 직원리와 경계에 있는 마을. 이 지역에 문푸래 나무(물푸레 나무)인 가목이 다른 수종에 비해 무성하게 잘고 있어 생긴 이름이다.
(2) 군대(軍垈洞)
옛적 연대미상 장찬성지(현 송계산성)와 백복령을 중심으로 동해안 지방에서 장찬성을 침범하는 군사들이 있던 곳으로 군대동이라 부르고 있다.
(3) 명주목이
교통이 불편했던 옛 사람들이 생활 필수품을 사러 삼척지방으로 오고 가는데 데바지령을 넘어가는 길목이 아주 잘록한 계곡을 지나가는, 매우 협소하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4) 구부렁골
이골 저골마다 가는 길이 구불구불 돌아야하는 지형에서 유래되어 구부렁골이라 칭하고 있다.
(5) 부수베리(火石舃洞)
옛 사람들이 일상생활용품으로 오늘날의 성냥 대신 돌과 돌을 마찰시켜 담배 불로 이용하던 부싯돌이 생산되던 곳으로 부수베리골이라 부르고 있다.
(6) 마상골(馬上谷)
옛적 전란 시 기마병을 양성시키기 위하여 군마를 사육, 훈련시키던 곳이다.
(7) 수봉어터골
군대동과 직원리 경계지역에 있는 골
(8) 배나무골
백복령 42번 국도 변 우측에 있는 골
(9) 과금골
강릉시 명주군 옥계면 생계리쪽에 위치한 골임
(10) 마흔골
옛날 40호가 살았다 하여 마흔골이라 한다.
(11) 진골
도전리에서 가목리와 경계지역으로 골이 길다는 뜻
(12) 베리골
가목리에서 부수베리로 접어드는 길에서 오른쪽으로 난 골짜기
(13) 개병골
명주목이에서 남쪽으로 난 골짜기. 괘병산쪽으로 난 골짜기여서 '괘병골'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변하여 '개병골'이 되었다.
(14) 사골
동해시 신흥리로 가는 골로 넷 집이 살았다는 골
(15) 칠만이골
더바지령이에 올라가 오른쪽으로 난 골짜기. 칙칙하다는 뜻의 '칡'과 '많이'가 더해져 '칡만이'에서 '칠만이'로 바뀌었다.
(16) 두래골
동해시 삼화로 가는(일명 더바지령) 골로 모든 지역을 두루 거쳐간다는 뜻임.
(17) 새목골
가목리와 도전리의 경계를 이루는 골짜기로 새목이로 난 골짜기.
1) 외도전(外道田)
바깥쪽에 있는 부락으로 외도전이라 한다.
2) 내도전(內道田)
안쪽에 있는 지역으로 내도전이라 한다.
(3) 너래골(廣石洞)
하천 변에 너래바위가 있는 곳으로 너래골이라 말한다.
(4) 형틀거리
옛날 병사들이 전장에서 군법을 준수치 않아 처형당할 때 사용하던 형틀이 설치되었던 부락에서 유래되었다.
(5) 장아리(士實洞)
국난으로 인하여 어지러운 세상을 비관, 모든 것을 이곳에 와서 마음속에 간직하던 충신 선비들이 그 때 떳떳하고 바르게 살아왔음을 전하여 후세 사람들이 장아리(藏雅) 또는 사실동이라 전하고 있다.
(6) 매바우(鷹岩洞)
바위 형태가 마치 매 모양으로 되었다 하여 응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곳의 형국에 묘자리가 복지형이 있다하여 응암동(매바우)골이라 전하고 있다.
(7) 상두전(상두계)
바위 밑의 게가 서로 마주보는 형국이라 하여 상두계 부락이라 전한다.
(8) 점구비
옛적 사람들이 밭갈이 보섭을 쇠로 녹여 만드는 부락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9) 기추목이
지금의 군사훈련소와 같이 이곳에서 천군만마(千軍萬馬)를 훈련시켰던 데서 이 지명이 생겼다.
(10) 은점구비(銀店洞)
지하자원인 은광(銀鑛)을 개발하여 생산하던 곳에서 유래되었으며 속칭 은전터, 은점구비라 부른다.
(11) 천패랭굴
옛날 전시에 패랭이를 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의 동굴 안에서 피난하였다하여 천패랭굴이라 말한다.
(12) 나무골
석회석 광산이 있으며 농가에서 가장 많이 나무하러 다니던 골임
(13) 뒤골
도전초등학교 뒤편 소유지 저수지가 있는 골임
(14) 아우라지
도전 1,2리 계곡 소하천 물이 합치는 지점임.
(15) 절골
하장면 유천리 가는곳에 옛날 사찰지임
(16) 버드내
유천부락이란 뜻임(柳川)
(17) 방아다리
두 갈래 골로 나누어 졌음.
(18) 하묵골
아우라지 아래 물구바골임
(19) 사실내골(새시내골)
(20) 도전
외도전 아래 마을로 본 부락을 말함.
(21) 선바위(섬바위)
먼 곳에서 보면 마치 곡식을 넣어 쌓아올린 섬 같이 보인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1) 구룡동(九龍洞)
아홉 마리의 용이 등천하였다는 전설에 의하여 구룡동이라고 한다.
(2) 노직동(老稷洞)
노근동이라고 하며 늙은피라고도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장찬성을 축조한 후 방어 시 노병을 그곳에 배치, 수비하라고 했는데 그 임무를 다하지 못하여 군율에 의해 처형함으로 노병이 피를 흘리고 죽었다하여 늘은피(늙은피)라고도 한다.
(3) 군대동(軍垈洞)
가목리의 군대동과 경계하며 이곳 역시 군인의 주둔지라 하여 군대동이라 부르고 있다.
(4) 영두촌
불모의 땅이었던 황무지를 개간하여 독가옥을 건축, 이주시킨 부락으로 방우리 버덩이라 한다.
(5) 화절촌(꽃재골)
부락간 조그마한 고개가 연결되어 있는 마을로 화절촌 또는 꽃재골이라 부르고 있다.
(6) 밭땟(道田洞)
도전리와 하천을 사이에 둔 자연부락으로 현재 직원리 또는 밭땟이라고 한다.
(7) 덧골
산집승 잡는 덧틀을 많이 놓았다는 골
(8) 움무골
위에 있다 하여 위에골을 움무골 발음 되었음.
(9) 살인골
살인이 있던 골로 살일골이라 부른다 함
(10) 사태골
사태 예전 네 쌍둥이를 낳았다는 뜻임.
(11) 작은아밭골
작은아들 살림밭을 주었다는 뜻임.
(12) 부돼지골
산돼지가 많이 있다는 뜻임.
(13) 새이골
두 마을 사이에 있는 마을
(14) 뚝다리골
두 마을 사이에 조그마한 다리를 놓고 다닌다는 마을
(15) 수무골
20호가 살았다는 마을
(16) 골말
마을 극변으로 골이 깊은 마을
(17) 당두
지금은 국유림으로 큰 분지가 되어있으며 초지 조성 및 목축지로 적합하며 옛 상계령 좌편에 있는 골 이름
(18) 관터
관원이 살았다하여 관터라 함. 이조 광무시절 지금 리를 원이라 하였음.(현里長)
(19) 큰피원
직원리 본 마을을 말함
(20) 작은피원
노직동 또는 노근동을 말함
(1) 관말(官村)
상임계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옛날에 행정기관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관터에 토석기와 등 잔재가 나온다하여 그 지명을 관말(관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2) 관두골(官後谷)
이 부락은 관말 뒤쪽에 있다하여 관두골이라 부른다.
(3) 점촌(店村)
점토질로 옹기그릇을 만들던 곳이라 하여 점촌이라 부르고 있다.
(4) 안그무(釗舞洞)
연대 미상이나 장찬(張贊)이란 장수가 허수아비를 세운 것이 칼춤을 추었다하여 근무동(검무동)이라 한다.
(5) 귀새
논농사를 짓기 위해 도수로를 만들 수 없어 좋은 소나무로 수통을 파서 연결하여 도수로를 이용한 마을로 귀새(수통이름)라고 한다.
(6) 태봉안(泰封洞)
고려 공민왕 때 이곳에 태봉 예정지로 정하였다고 하며 지금 부락 입구 산봉우리에 태봉 텃자리가 있으며 이 마을 지명을 태봉안이라 한다.
(7) 가실피(歌瑟琵)
옛적 사람들이 관촌 오는 길 여정에 쉼터로 피로를 달래며 노래 불러 보던 곳이라 한다.
(8) 도진(道眞)
왕산면 고단리와 임계면 임계리로써 면계 및 군계로 지정된 부락이다.
(9) 고내(花川)
심산계곡 청계천변에 아름다운 꽃이 만발함을 의미, 그 마을 지명을 화천(꽃내)이라 지은 것이 보통 부르기를「고내」라 한다.
(10) 금방동(近方洞)
석병사 아래 명당 묘자리 갈마음수형이 근방(近方)에 있으리라 하여 금방동이라 이름지어 말한다.
(11) 울소골(鳴沼洞)
석병산을 시원으로 흐르는 계곡 물이 절벽에서 폭포수가 되어 흐르며 소에서 소리가 들린다하여 울소골이라 한다.
(12) 팥발골(豆田洞)
그 지형이 남방향으로 오곡물 중 콩, 밭 등의 곡식이 잘 된다하여 두전동(팥밭골)이라 칭한다.
(13) 큰골(大谷)
석병산 아래 깊은 갈마늪이 있는데 그중 지형이 제일 넓다하여 큰골이라 한다.
(14) 평양말(平壤村)
광산 김씨 중시조(光山金氏中始租)가 사화시 평양을 피신하여 이곳으로 낙향하여 살았다 하여 평양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15) 노루마당(獐坪)
석병산 아래 명당 묘자리 주장 탈망형이 있다하여 노루마당이라 한다.
(16) 장성거리(長城洞)
그 지역의 안녕을 빌고 재앙을 추방하여 이정표 역할을 하는 장승백을 세운 곳으로 장승거리라 부르고 있다.
(17) 월대골
도룸산 북쪽에 위치한 골 이름 형 한규상 사는 골
(18) 송이밭골
송이가 생산되는 골 이름
(19) 절골
예전 사찰지임
(20) 늘목이골
임계리에서 왕산면 고단리 부락으로 다니던 경계지골 이름
(21) 살피골
눈이 많이 내릴 때 살피를 신고 사냥하던 골
(22) 나근터골
고내에서 금방동으로 올라가다 왼쪽으로 난 골짜기
(23) 밤나무골
참밤나무가 있다하여 밤나무골이라 함.
(24) 가장골
농기구 만드는 대장간이 있던 곳
(25) 물방아골
물레방아가 있던 곳
(26) 한사리골
칡넝쿨을 한사리 두사리 뜯던 골 이름임.
(27) 땔나무골
부락에서 땔나무를 많이 하러 다니던 골이름
(28) 거지골
밥을 빌어먹는 거지들이 모여 있던 곳
(29) 통노골
현장성거부락에서 직원리로 가는 길로 외골길이란 뜻임.
(30) 우고내
화성동을 고내라고 하며 아랫고내의 금방동으로 가는 지역을 우고내라고 한다.
(31) 기르마동
명당자리의 묘지가 있다하여 이곳을 살피기 위해 말을 머물게 했다는 뜻임
(32) 계루마동
석병석 아래, 갈마음수형의 묘지에 말을 머물게 했다는 뜻임.
(33) 독호
점촌 윗쪽의 고래마루 부락으로 옛날에 한집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4) 불당골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1)송계동(松溪洞)
임계면 소재지 중심마을로 '본동'이라고 한다. 국도35호선과 42호선의 교차지점으로 동쪽으로 동해시와 삼척시, 북쪽으로 강릉시, 남쪽으로 태백시와 연결되는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이다.
(2) 뒷말(後洞)
본동 뒤편에 있다하여 뒷말이라 부르며 그 곳에서 면 시가지를 내다보면 장관인 부락이다.
(3) 새벼리(新硯洞)
이 부락은 마을 뒷편에는 칠성바위가 있으며 옛적에는 샛별 마을로 불러오던 것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차츰 변하여 새벼리(新硯)라 부른다.
(4) 소탄(松院洞)
노추산 줄기인 큰 너그니재 밑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이곳에 원님터가 있다하여 송원동 또는 소탄이라 부르고 있다.
(5) 소메기골
노추산 줄기로 주위에 명당자리인 와우형 묘자리가 있다하여 소매골이라 부르고 있다.
(6) 옹기장골
덕우산하 현 송계2리 끝마을에 속하며 국도 35번 좌측 편에 속한 골 이름
(7) 문동이골
사람은 살지 안은 뜻하며 옛적 관원들이 다닐 적에 일찍 출발하여 이곳에 왔을 때에 먼동이 터서 밝음을 표한 말이 (먼동이 터서) 문동이골 변어가 된 듯함.
(8) 도수장골
도수장을 설치 도축하던 곳으로 현 송계8리 서편에 있으며 42번 국도 변 우측에 있음
(9) 진골
소란 삼거리 예전 성황당 입구부터 작은 너그그니 재 밑까지를 진골이라 함.
(10) 공동묘지골
옛날에는 집이 있었으나 지금은 공동묘지만 있다. 버들고개로 가는 왼쪽골이다.
(11) 송원골
지금의 소란 본동을 말함
(1) 본동(本洞)
봉산리 본부락을 말하며 수고당이 있는 마을임.
(2) 바위안(岩內洞)
주위 산세가 암석으로 되어 있으며 골지천과 임계천이 합하여 앞으로 흐르며 남향으로 아늑한 마을임.
(3) 송촌(松村)
마산봉 아래 있는 부락으로 노송이 우거지고 주위에 방풍림 소나무가 가득한 곳으로 송림에 싸인 마을이라 송천이라 지칭한 것인데 지금은 방풍림을 전부 벌채하여 논으로 개답하였다.
(4) 등붕골(登鵬洞)
주위의 산세는 절벽으로 아름답고 수목이 울창한데 시냇물이 맑게 흐르며 계곡이 협소하여 인적이 드문 곳으로 보라매, 독수리 등 큰 새가 하늘 높이 자주 날고 있음으로 등붕골이라 한다.
(5) 장찬동(張贊洞)
장천성지 아래 있는 마을이라 장찬골이라 부른다.
(6) 점구비(店洞)
무쇠를 녹여 농기구 밭갈이 보섭을 만드는 곳을 점무리 또는 점구비라고 한다.
(7) 말루(斗樓)
산 정상에 인가가 있는 곳으로 주위에서 보면 무인지경 같이 보이는 곳이다. 옛적에는 피난지라하여 마치 높은 곳에 있는 누각에 비한 것이다.
(8) 가랭이
말루부락 산밑 강변 구미정 상류천변에 위치한 곳으로 주위가 그 절경이 아름다우며 산밑 바른쪽 양지 바른 속이라 일명 가양(佳陽)이라 하였던 바 시대 사두리 흐름에 따라 가랭이로 변하였음.
(9) 안산(案山)
임계면 소재지 앞에 있는 곳이라 하여 안산이라 하며 민가는 거의 철거되고 전으로 여러 가지 농산물이 생산되고 있음
(10) 구미정(九美亭)
이조 숙종시 이조판서 이자(李慈)가 당파싸움으로 벼슬을 버리고 이곳 봉산리를 은거지로 정하고 본리로부터 약 4떨어진 곳에 휴양처로 建坪 12坪의 목조건물 정자를 건립. 이 亭子 주위에는 아홉 가지 特色의 絶景이 있어 九美亭이라 이름지은 것이고 附近 또한 十八景의 名勝이 있어 지금에 九美十八景이라 부르고 있으며 九美亭만을 열거하여 본다.
① 전주(田疇)
九美亭 뒤편에 전원 부락의 밭을 말함
② 석지(石池)
九美亭 뒤편에 自然石池가 되어있음 지금은 거의 토사가 침몰되어 갈대가 우거지고 있음.
③ 어량(漁粱)
정자 아래편에 두 갈래 홈이 져서 물이 흐르고 있는데 이 홈을 장찬나무로 걸쳐 막으면 그 위로 고기가 뛰어넘어 간다는 뜻으로 漁梁이라 말한다.
④ 평암(平岩)
정자 앞 강변바닥 널리 평암이 되어 있는 것을 말함
⑤ 반서(盤嶋)
정자 앞 평암이 높은 곳이 홍수 시에 左右 양편으로 물이 흐르면 마치 섬모양으로 보이어 盤嶋라 한다.
⑥ 층대(層臺)
정자 앞산이 석회암 산으로 첩첩이 쌓여 올라간 것과 같아 層臺라 한다.
⑦ 취벽(翠壁)
정자 앞산이 마치 그 절경이 屛風을 두른 듯 하다하여 아름다움을 취벽이라 말한다. 봄 진달래꽃 피면 더욱 절경이다.
⑧ 징담(澄潭)
정자 아래 깊은 沼가 되어 흐르고 있는 강물을 말하는데 맑고 고요한 못으로 말한 것임
⑨ 열수(列峀)
九美亭앞 나직한 山봉우리가 열거되어 있다는 뜻을 말함
(1) 역두루(歷坪)
옛적에 관원이 통행하는 마필을 관장하는 찰방(정7품)이 있어 다스리던 곳을 역촌이란 뜻이 변하여 역두루라 부르고 있다.
(2) 태골(基谷)
연대는 미상이나 옛적에 장재(長財) 부자터가 있었다하여 터골을 테골이라 칭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태골이라 하였다.
(3) 설내 (穴川)
이곳은 노인봉을 안산으로 하여 굽이굽이 흐르는 골지천이 서로 조화되어 그 전경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문전옥토는 이 고장에 버금가는 곳으로 옛적에 빈민구제를 하던 창촌으로 지형이 아담한 마을로 뒷산이 석회암 지대로 자연동굴이 발생, 석천수(石泉水)가 용출되어 이 물로 혈천-역평마을 수만 평 논에 관개수로 이용되며 수온이 양어장 적지로 양어양식도 하는 천혜의 부락으로 혈천(穴川)을 설내라 부른다.
(4) 오누골(鳴谷)
위령산 아래 있는 계곡 마을로 입구는 같으나 조금 들어가면 두 골로 나뉘어 한곳은 고양리 하승두로 가는 길이며, 한곳은 조개골 미륵재로 가는 부락으로 두 골이 같다하여 오누이 골이라 한다.
(5) 조개골
문래산맥 협소한 계곡 부락으로 천지개벽 시에 산 중턱에 조개껍질이 있다하여 조개골이라 한다.
(6) 삼박골
부락 입구는 하나로 세 갈래로 계곡이 형성되었다하여 삼박골이다.
(7) 탑거리
부락 입구에 오고 가던 나그네들이 돌로 탑을 모았다하여 탑거리라 부른다. 지금은 무인촌이다.
(8) 세루(細樓)
봉산리 장천동에서 용산리 세류와 경계지이다.
(9) 석동거리(三洞里)
부락형태가 위, 중간, 아래 세 갈래 부락으로 나누어져 석동거리라 불렀다.
(10) 늪밭골
중봉산하(中峯山下) 오지부락으로 비습한 곳(음한곳)으로 늪밭골이며 지금은 무인촌이다.
(11) 오무골
중봉산하에 첩첩산중인 오지부락으로 다섯째 부락 중 한 부락이라 하여 오무골이라 부른다.
(12) 미락이(美樂洞)
단봉산(丹峯山) 아래 아담한 마을로 전답이 비옥하고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 이곳은 옛날 불교 전성기에 사지(寺止)로써 지금도 곳곳에 기와장이 땅속에 매장되어 있으며 사찰 우물터도 부락 중심지에 위치하여 샘물이 끊이지 않으며, 부락 입구에 탑이 예전 홍수 시 유실되었으나 홍수 시 다시 탑돌갓이 노출되어 있으며 마치 바위 형태가 미륵불과 같다 하여 미륵동이 미락동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이 마을을 다시 부분적으로 나누어 골말, 지름골, 객동, 탑거리, 버덩말 등으로 부르고 있다.
(13) 사을기(寺乙基)
이 부락은 현 낙천2리에 속한 부락으로 뒤로는 단봉산을, 앞으로는 구미십팔경(九美十八景)을 자랑하는 구미정(九美亭)이 위치한 마을로 역시 사찰지로 단봉산 중턱에 절터 끝이라 부르며 여름철 강변 유원지로서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곳이다.
(14) 지름골
미락봉 단봉산하 옥녀 즉 금형에 명당자리가 있다는 전설과 함께 지름골이란 지명이 있음
(15) 골말
낙천2리에서 고양리로 가는 미륵재 깊은 골인데 미륵바위가 입구 우편에 있었음
(16) 버덩말
낙천2리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논과 밭이 놓여진 곳으로 버덩마을이라 한다.
(17) 탑거리
미락동(낙천2리) 입구이며 예전 사찰지로서 부락 입구에 탑을 쌓아 탑거리라 한다.
(18) 움골
가난한 사람들이 움막처럼 집을 짓고 농사 지으며 살던 곳인데 일본치하에 금,은광이 개발 20맥이란 갱도가 있으므로 지금은 20맥 골이라 한다.
(19) 칠구집골
현 낙천3리 조개골이란 부락에 안칠구란 사람이 살았다 하여 칠구집골이라 한다.
(20) 샘물웅덩이
낙천3리 현천부락으로 샘물이 동굴 속에서 나온다 하여 샘물웅덩이라 한다.
(21) 뒤버덩
낙천3리 답개간 지역들을 말함
(1) 월탄(月灘)
용산리 중심마을이다. '냇물이 흐르는 들판'이란 뜻으로 우리말 지명 '달'을 한자 '월'로 표기하며 월탄이 되었다.
(2) 중구평(中邱坪)
논으로 된 평지 들판과 밭으로 된 경사가 진 언덕 들판으로 마치 계단식처럼 형성되었는데 옛날에는 들판 중간의 언덕 기슭으로 지나다니게 되었으므로 들판 사이 길이란 말이다.
(3) 위령이(威靈)
이 부락은 위령산 이름을 따서 위령이라 부르며 음지마을로 뒷산 산록 8부 능선에 석천수(石泉水)가 있으며 미신론자들이 산당을 모아 놓고 건강을 기원하고 재앙을 없애 달라고 치성을 올리던 곳도 있다.
(4) 범정골
중봉리 청옥산 낙맥으로 산이 높고 계곡이 깊으며 옛날 호랑이가 나다녔다하여 범정골이라 전하고 있다.
(5) 햇골
중봉리 청옥산 맥으로 첩첩산중으로 극빈자들이 화전을 개간하여 새로이 생긴 마을이라 하여 햇골이라 부른다.
(6) 세루(細樓)
청옥산 낙맥으로 심산계곡이 협소한 곳으로 오지에 들어가 인가가 있어서 마치 조그마한 누각이 있는 듯하며 세루골이라 부르고 있다.
(7) 돈들(錢坪)
문래산이 안산으로 절경이 수려하며 토질이 기름지고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풍요로운 들이란 뜻과 마치 지형이 옛날 돈 모양으로 골지천이 휘어 돌아 돈들이라 속칭 돈뜰이라고 한다.
(8) 용골(龍洞)
예전 이 마을에 큰못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용이 나왔다고 하여 용동이란 말이 전하여 오고 있다.
(9) 범정골
옛날에는 호랑이가 있었다 하여 범정골이라 한다.
(10) 싸근다리
싸리나무가 많았다 하여 싸근다리라 하여 35번 국도 변 우측이다.
(11) 너머싸근다리
싸근다리에서 조금 돌아온 곳을 너머싸근다리라 한다.
(12) 오작골
햇골에서 갈림골을 오작골이라 한다.
(13) 오묵골
다섯 집이 살았다 하여 오묵골이라 한다.
(14) 명당바위
명당자리가 있다하여 명당바위라 한다.
(15) 장기바위
옛 사람들이 장기놀이를 하였다 함
(16) 광대바위
위령산 밑 강변에 있으며 광대가 놀던 곳임
(17) 갈매바위
갈매기가 많이 놀던 곳임
(18) 암자궁
예전에 절과 암자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없음
(19) 황창골
황철나무가 많았으며 민가는 철거되고 없음
(20) 배둔지골
선비가 뱃놀이를 하며 놀던 곳이라 함. 지금 용산 솔밭가든 아래 소를 말함
(21) 정기바위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매일 술을 마시며 뱃놀이를 하던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의 큰 바위 밑에 긴 수염을 가진 메기가 있었는데 메기 수염이 보이면 그 해 큰 홍수가 났다고 하며 어느 때 낙뢰(벼락)가 바위를 때려 큰 메기가 보이지 않았다고 함
(22) 바리골
골지리 가는 덧재 아래에 있는 골로 해마다 농사가 잘되어 추수할 때는 바리(소나 말의 등짐)로 곡식을 운반했다고 하여 붙인 이름
(23) 째기골
바리골로 가다가 절골 사이에 생긴 골을 말한다.
(1) 음지마을(陰村)
문래산 아래 햇볕이 잘 들지 않는 마을에서 유래되었다.
(2) 양지마을(陽村)
문래산 아래 있으며 비옥한 농토에 살기 좋은 마을이란 뜻이다.
(3) 하촌(下村)
임계면 내에서는 답작지대로는 제일 큰 들판으로 형성된 아래 마을이란 말이다.
(4) 장터거리(三巨里)
위치가 삼거리로 되어 있으며 오고 가던 나그네들이 운집하던 곳으로 한때 은 광산이 개발되어 시장을 이룰 만큼 복잡한 거리를 말한 것이다.
(5) 마태골(馬駄谷)
구한국 시절에 관원이 있어, 오고 가던 관원들에게 마필을 배정하던 곳으로 지금의 우정사무 책임자와 같다.
(6) 석둔(石屯)
전란 시 돌을 모아 방어태세를 갖추어 놓은 곳이라 하여 돌무더기가 많아 유래되었다.
(7) 세루골(細樓谷)
산자수려한 계곡으로 협소한 마을을 뜻한다.
(8) 버섯바위골
이 마을 뒷산에 석유버섯(바위에서 돋는 버섯)이 난다하여 버섯바위골이라 부르고 있다.
(9) 갈버덩이
골지리 하동 뒷산 버덩이를 개간하여 살고있는 습지로써 갈무렁이라고도 부르나 갈버덩이라 많이 부르고 있다.
(10) 말미버당
골지 음지마을 위쪽에 있으며 예전 구길로 많은 말이 다니던 길목이란 뜻
(11) 뒤골
문래리 하동마을 뒤편 골 이름
(12) 독장골
새늪지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를 넘어가면 용산리 하동 마른골에 이르게 된다.
(13) 병두골
골지 음지마을에 있으며 山모양이 옛날 병 모양 같다하여 병두골
(14) 새목이
용산리와 골지리 경계지점이며 鳥項골이라 함
(15) 골거리
덕암리 자근소라골 가는골이며 옛날 절터가 있었으며 마지막 골이란 뜻임
(16) 개금벌
골지 하동(벌판) 논벌을 開金坪이라 한다.
(17) 문래주골
문래산 아래 있으며 지금은 민가는 살고 있지 않음
(18) 절골
문래주골 안쪽에 절이 있었음
(1) 작은 소래(小所羅)
화암면 북동리와 경계지역임.
(2) 큰 소래(大所羅)
고랭지 소채 생산지로 동면 북동재와 경계임.
(3) 새이골(말)
덕암리 입구 지점에 있는 부락으로 벳둔골과 소래골 사이 지점에 위치한 자연부락임.
(4) 벳둔골
구용골 입구의 자연부락으로 형국이 배 모양의 형상에서 유래됨
(5) 구용골(九用谷)
자연부락이 많으며 동광산(銅鑛産)이 개발되어 채광하였던 곳이다.
(6) 무낼골(水出谷)
계절에 구애 없이 많은 샘물이 솟는다하여 유래되었으며 이 물을 이용, 현재 송어양식장을 이용하고 있음.
(7) 동무지(童舞地)
산자수려한 길은 계곡이라 하여 장강촌(長江村)이라고도 부른다.
(8) 삼배골(三培谷)
장간촌 입구에 있는 부락이다.
(9) 버실리(代門)
동면 화표동과 경계지역으로 버실리재가 종점인 지역이다.
(10) 위밀이골(牛尾谷)
옛날에 장재(큰 부자집)가 살고 있던 마을로 장수대가 두 개 있었는데 덕암리 쪽 장수대는 파손되고, 동면지역에 위치한 장수대는 파손되지 않았다고 함
(11) 송이재
덕암리 마지막 자연부락으로 동면 건천리를 경계한 부락이다.
(12) 장강촌
長江村 별다른 지명유래가 없이 童舞地로부터 伐文 위 미리골까지 연결 합수된 계곡 강물이 흐르던 뜻으로 장강촌이라 부르는 듯함
(13) 공전리(公田里)
下長面 公田里와 계곡을 사이에 두고 공전리라 부르고 있음
(14) 소래어구
큰 소래, 작은 소래로 들어가는 입구를 말한다.
(1) 재운(城北)
예전에는 자운동(紫雲洞)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재운(城北洞)이라 하며 다시 분류하여 양지말, 새이말, 아래재운이라 부르고 있다.
(2) 노일(魯逸)
반천리 중심부락으로 봉정리와 고양리로 가는 길목이며 산천 경개가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물은 선유에 으뜸가는 곳으로 보아 옛 선비나 나그네들이 그 절경에 도취되어 어리석은 사람처럼 그날 그날을 편안하고 한가롭게 보내던 시절을 상기, 노일(魯逸)이라 칭한 것이다.
(3) 도장골(道長谷)
마을 형태가 들판이 아니고 산기슭에 위치, 계곡과 길을 따라 깊게 이어져 있다는 뜻이다.
(4) 어전(於田
느랏)
늘버밭이→느랏으로 옛적에는 마을 이름이 이대곡(梨大谷)이라 하여 지금도 자연계곡마다 배나무골, 신배나무골, 탁배나무골로 부르고 있으며 창촌(적곡)이 있어 面長이 춘궁기에 빈민구제사업을 하던 마을로 양곡창 건물은 예전 임계면사무소(철거한 구건물)로 이전하였으며 한일합방 후 이대곡(梨大谷)을 어전(於田)이라 부르게 되었다.
(5) 월루(月樓)
산 높은 곳에 달과 같이 둥근 마을이 있어 달빛 아래 빛나는 누각과 같다하여 월루라 한다.
(6) 산성(山城)
산 정상에 마을이 형성되어 인가가 성곽과 다름없다하여 산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7) 북바위골
월루에서 북쪽으로 난 골짜기.
(8) 등봉동(登鳳洞)
반천리에 속했다가 지금은 봉산3리에 속하였다.
(9) 여우실
강변 여울목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여우쇠라 부른다.
(10) 용두둑
어전 저수지 위편에 있으며 반천리 자주윤씨 조상 묘와 배씨 조상묘가 많으며 배씨 조상묘지가 소문혈이라 하여 용두둑이라 한다 함
(11) 덕시
봉산 3리 등봉동 뒤편 왕치산 팔부 능선에 위치하였으며 예전에는 덕새풀이 많았던 곳이 개단 후 민가가 들어와서 살면서 변어가 되어 덕시라 함
(12) 안터
봉산 3리 등봉동 맞은편에 있는 부락으로 반천리 1번지가 이곳서부터 시작되었음
(13) 몰아우골
등봉동 뒤쪽 골이며 물이 처음 시작 나온다는 말(원천수를 말함)
( 14) 성북동
옛날 자운동(재운)의 아랫재운을 말함
(1) 노나무(赤木洞)
이 마을은 고양산 아래 있는 마을로 적목동 또는 노나무라 부르고 있으나 옛날의 사찰지(절터)가 있어, 1971년도 이곳에서 여래좌불상 금궤가 발굴되어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보물로 판명되어 박물관에 소장된 바도 있다. 절터로 보아서는 절골이라 부르던 곳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적목동이라 변어(變語)된 것이라 생각된다.
(2) 새이말
수기동과 적목동 사이에 있는 부락으로 새이말이라 한다.
(3) 수터(水基洞)
고양리 입구에 위치한 부락으로 산고수장(山高水長). 심산계곡(深山溪谷)으로 두 갈래 계곡에서 사시절(四時節) 물이 흐를 것 같으나 홍수기를 제외하고는 항시 건천으로 되어 있으며, 홍수 때에 유실된 자리라 하여 수터라 부르고 있다.
(4) 하승두(下升斗)
문래산과 고양산 사이에 위치한 부락으로 대체적으로 토질이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어 가난한 시절 소량의 식량을 나누어 먹으면서 피난살이를 하였다하여 신두곡(升斗谷)이라 하였다.
(5) 고수마리
협소한 오지마을을 새로이 개척하여 조상에게 음덕을 기리면서 부모형제끼리 효행심을 서로 지키고 5~6 가호가 인보상조심으로 살아왔다 하여 세칭 고수마리라고 정하여 온다.
(6) 하일(下日)
상신두골(上升豆谷)에서 아래 마을이란 뜻에서 부른 마을이다.
(7) 소래골(所羅)
덕암리, 소소라, 큰소라와 연결되는 소래재 밑에 있는 부락으로 6.25사변 때 소개명령(疏開命令)지역으로 전부 소실되어 지금은 무인가 부락이 되었다.
(8) 상승두(上升豆)
심산계곡을 개척하여 오손도손 한말, 한 되의 식량을 나누어 먹으며 가난한 시절의 신개척지를 말한 것이다.
(9) 덕질(德峙)
지금 적목동(노마무골)에 절이 있을 때 사이에 조그마한 재를 두고 왕래하며 부처님의 자비심을 수도하면서 덕행위본에 뜻을 지닌 사람이 산다하여 덕질마을이라 칭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10) 절골
적목동에서 상신두재로 가는 곳을 절골이라 한다. 예전 이곳에 절터가 있었으며 1972년도 금부치 여래좌불상이 초등학교 학생들이 발견 강원도 문화재관리국으로 이관된 것으로 알고 있음
(11) 다래재
소리골~상신두 사이에 있는 마을로 다래재 밑에 있다하여 아래 다래재라 함
(12) 손오거리
수기동과 적목동 사이에 있는 부락으로 예전 반가운 친구나 집안 사람을 맞이하던 곳으로 손오거리라 불러오는 뜻이 아닌가 봄
(13) 승지골
수터마을에서 하승두로 가는 골짜기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