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관음사(정선읍 봉양 6리)에 일춘대사라는 승려가 있었다. 이 승려는 불도에 정통(精通)하여 세인의 존경을 받아 왔는데 한때 일춘대사는 관음벼루 절벽 아래다 인마(人馬)가 통행할 수 있는 교량을 가설하겠다고 민가의 재물과 고철을 수집하였으나 당초의 약속과는 달리 약속을 어기고 이를 팔아 착복하였으니 일춘대사는 금시에 부자(富者)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문(佛門)에 죄를 얻은 대사는 얼마후 부처님의 죄를 받아 큰 먹구렁이로 변해 통로를 가로막아 관음사를 찾아드는 행객(行客)은 끊어지고 절은 얼마 안가서 쑥대밭에 묻히게 됐다.
그로부터 십여년 세월이 흘러간 후 어느해 봄의 일이다. 때마침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서울로 과거보러 가던 선비 4사람이 정선을 지나가게 되어 주막에서 유숙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의 꿈에 백살노인이 머리에 송낙을 쓰고 목에는 백팔 염주를 걸고 점란가사에 구절죽장을 짚고 와서 합장하고 허리를 구부려 정중히 절을 하며 말하기를 나는 이곳 관음사에 있는 승려로 불문에 득죄(得罪)하여 뱀으로 변신된지 오래였는데 지금 다행히 귀인을 만났으니 바라건데 공(公)은 노고를 아끼지 말고 화주일춘(化主一春) 네 자만 관음벼루 석벽에 새겨 왕래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여 주면 공은 이번 과거에 급제할 것이며 소승도 불문의 죄를 면하게 될 것이니 내 말을 잊지 말고 꼭 새겨달라고 당부했다.
선비가 잠을 깨니 꿈이라 이상히 여겨 일행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주막주인에게 사실을 물어보니 그런 일이 있다하여 승려의 말대로 글씨를 새길 것을 결심하니 같은 일행 중 자기 혼자 과거에 급제하기 보다는 다같이 급제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 하며 네 사람이 뜻을 모아 한 자씩 화주일춘 넉자를 새겨놓고 한양길을 떠났다. 그후 신기하게도 모두 급제하여 금의귀향 했으며 관음벼루 절벽에 가로누워 행인의 발길을 막던 구렁이는 자취를 감추고 행인은 마음놓고 이곳을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 전한다.
오래전 옛날 정선읍 용탄리에 벽절이라 불리우는 사찰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지에 사탑만이 있어 그 확실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재미있는 전설이 전하여 오고 있다. 옛날 이 벽절에는 2~3명의 승려가 있었는데 하루는 달빛이 교교한 밤중 조용한 사찰주변에 멀지않은 강변에서 웬 여인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들여오고 있었다. 이 소리를 들은 노승은 마음이 섬뜩함을 느끼면서 울음소리가 나는 곳을 황급히 달려가 보니 나이가 20세 가량 되었을까 말까하는 꽃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맨버선발을 치맛자락으로 머리를 덮어쓰며 강물에 뛰어들려고 하였다. 노승은 급히 가서 물에 빠지려는 여인을 만류하며 「어인 일이신지 몰라도 젊은 나이에 목숨을 버리려 하십니까?」한즉 여인은「남편을 여의고 청상과부가 되니 차라리 먼저 가신 남편을 따라 저 세상으로 가려고 합니다」하고 몸부림을 치니 노승이 위로하기를「부인께서는 마음을 고쳐먹고 부처님께 자신의 부덕함을 사죄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어줌이 옳지 않느냐?」고 타일러서 그날부터 여인은 절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후부터 그녀는 벽절에서 수도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며 나날을 보내게 되었는데 시일이 경과할수록 이 노승의 마음은 여인으로 하여 흔들리게 되고 여인 또한 고적한 산중에서 외로움을 견딜수가 없이 노승에게 마음이 기울어지고 의지하게끔 되었다. 이에 마침내 두 사람의 정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앞 뒤 분별도 할 수 없이 사랑에 빠지고 말았으니 이 두 사람만의 은밀한 관계는 마침내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고 말았다. 이 두 사람의 소행을 괘씸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 중에는 의분의 분에 넘친 젊은이들이 작당하여 두 사람을 징벌키로 정하고 벽절로 몰려가 보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벽절은 흔적도 없이 없어지고 노승과 여인이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이는 분명히 부처님의 노함을 받아 추방되었을 것이라 전하며 뒷날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절이 자리를 옮겨 지금의 경기도 여주읍 앞산에 위치하고 있는 같은 이름의 벽절이 되었다고 하며 한때는 이곳 사람들이 여주에 가서 절세를 받아 왔다는 말도 전하고 있으나 이것은 알 수 없는 일이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이 절터에는 이름없는 석탑이 있을 뿐이다.
옛날 정선읍에 황씨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사람됨이 인색(吝嗇)하고 성질이 거칠어 이웃간에 돈만 아는 먹통이라고 별명이 붙어 미움을 받아 왔는데 하루는 홀연히 노승이 나타나 황부자에게 시주를 청하니 괴벽스런 황부자는 시주할 쌀이 어디 있느냐 하고 소리를 벌컥 지르며 마구간에 들어가 쇠똥을 한 삽 떠주니 늙은 승려는 바랑을 벌려 받아 넣고 합장 배례하고 돌아서면서 이 집의 가운(家運)이 이제 다 됐으니 곧 망하리라 한마디 남기고 죽장망해를 끌며 떠났다.이 말을 들은 황부자는 화가 치밀어 참지를 못하고 펄쩍 뛰며 자기 집에 있는 기골이 장대하고 날쌘 왕바우란 하인을 시켜 그 승려를 잡아오라고 하였다. 왕바우가 부랴부랴 짚신 끈을 매고 노승을 뒤쫓아 힘껏 달려갔으나 이상하게도 노승은 잡힐 듯 하면서도 따를 수가 없었다. 애가 타서 숨을 헐떡거리는 왕바우는 온 몸에 땀이 비오듯 하는데도 노승은 여전히 태연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노승이 돌아서더니 너는 악한 주인의 죄를 대신 받아야 하느니라 하고 말하며 지팡이로 땅을 세 번 울리니 이게 웬일인가, 왕바우는 그 자리에서 꼼짝을 못하고 발이 붙어 떨어지질 않고 차차 혈맥이 굳어져 장승처럼 선 채로 죽고 말았다. 그 뒤로부터 이곳은 비명에 간 왕바우 서리라고 불리워졌으며 그후 얼마 안가 노승의 말대로 황부자도 벼락을 맞아 집과 가솔이 몰살을 당해 이름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이 같은 전설을 지니고 있는 이 왕바우 서리에는 조양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인심은 조석(朝夕)변이요, 강산도 십년이면 변한다는 옛말이 있다. 이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기 어렵다는 말과도 뜻이 상통되는 이야기라고 보면 때로 인간은 신의 섭리를 쫓아 자연과 더불어 생존해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태초에 하느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했고 또 이를 조화시키기 위해 각처의 명산을 끌어 모아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꾸몄다 하니 무한한 신의 힘을 인간이 의지하지 않을 수 없을 수밖에, 그러나 여기 전하여지는 전설이 있다.
정선읍 봉양 7리 속칭 적거리(원명:덕거리)라는 자연부락이 있다.지금은 산천이 변해 이 마을의 옛 초가집은 간데 없고 상수도 수원지와 주택이 개량된 현대식 건물이지만 옛날에는 정선읍내에서도 살기 좋은 마을이라고 이름난 곳이였고 마을 앞에는 가지런히 세(三)봉우리의 아담한 산이 있었으니 이 산이 바로 삼봉산이란 유명한 명산이었다. 당시 이 산 중턱에는 이 고을 향교가 위치했고 산새소리와 함께 절벽 밑으로는 조양강(朝陽江) 맑은 물이 구비쳐 흘렀으니 보는 사람마다 그 아름다움을 감탄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있은지 13년 후 을사년(乙巳年)에 큰 홍수가나 하루밤 사이에 이 삼봉산은 홍수에 밀려 떠내려가 자취를 감추었다. 삼봉산을 잃어버린 이 마을 사람들은 홍수가 줄어들자 유실된 삼봉산을 찾고자 의논한 끝에 기골이 장대한 장정 다섯 사람을 뽑아 강물을 따라 산을 찾으러 떠났다. 그러나 보름이 넘도록 고생을 무릎 쓰고 헤매였으나 삼봉산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숲속에서 밤을 지새고 아침해가 떠오를 때였다. 한 장정이 갑자기 산을 찾았다고 소리쳐 일행이 눈을 모아 바라보니 저 멀리 아득히 보이는 곳에 세 봉우리의 산이 있지 않은가? 모두가 기뻐서 숨가쁘게 달려가 보니 도담(충북 단양군 매포면)강 물 가운데 떠내려오다 자리잡힌 봉우리들이 흙은 홍수에 씻겨 떠내려가 버리고 바위만 남았으니 산세로 미루어 보아 삼봉산이 틀림없었다. 잃어버린 산을 찾은 이 마을 사람들은 그로부터 수 십년 동안 해마다 가을이면 단양군 매포면 도담에 가 삼봉산의 산세를 꼬박꼬박 받아왔다. 그러던 어느해 예년대로 산세를 받으러 갔는데 마침 산세를 줄 돈 준비가 안돼서 "돈내라" "좀 기다려라"하며 서로간의 언쟁이 벌어져 떠들썩한 판인데 그때 겨우 대여섯살 남짓한 동자가 앞에 나서며 "산세를 들어드릴 수 없으니 당장이라도 삼봉산을 다시 가져 가십시요."라고 거부하니 돈 받으러 간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답변할 말이 없어 빈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는 신화같은 이야기가 전하여지고 있다. 지금의 옛 삼봉산 자리에는 봉양초등학교와 정선역이 자리잡고 있어 상전벽해란 말이 이를 두고 말한 것 같다.
정선군 정선읍 덕송리 월천동(月川洞) 앞에는 범여울이라는 여울이 있다. 이 여울은 남한강 상류에서 지금부터 약 100여년전 어미 호랑이 한 마리가 새끼호랑이 두 마리를 데리고 이 여울을 건너려고 하자 두 마리 어린 호랑이는 함께 어미 호랑이를 따라 가려고 앙탈을 부리니 어미 호랑이는 새끼 두 마리를 함께 물고 건널수가 없어서 한 마리씩 물어 나르기로 작정하고 큰돌로 한 마리를 눌러놓고 다른 한 마리를 물고 강을 건너 놓으니 그놈이 어미 호랑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앙탈을 하여 어미 호랑이는 할 수 없이 또 큰돌로 그 새끼 호랑이를 눌러놓고 강 저편에 있는 새끼 호랑이를 데리러 와보니 돌 밑에 어린 호랑이는 이미 죽어있었다. 어미호랑이는 울부짖으며 강을 도로 건너와 보니 이쪽의 돌밑에 있는 호랑이도 이미 죽어있는지라 어미 호랑이는 미쳐 날뛰며 밤새워 울다가 날이 밝으니 뒷산으로 숨어버렸다가 다시 밤이 되면 또 나타나서 울부짖기를 며칠밤이나 계속함으로 동네사람들이 불안과 공포에 떨다가 서로 의논한 끝에 나무를 강변에 많이 쌓아놓고 밤마다 불을 놓아 나무를 태웠더니 범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고요한 자정 때의 물 흐르는 소리는 그 당시 범이 울부짖는 소리같이 들린다고 한다.
서기 1506년(연산 12년) 연산의 폭정은 마침내 반정을 부르고 반공공신들은 그날 밤으로 연산군을 강화섬 건너 교동도에 유배시키고 폐서자 노와 어린 형제들은 정선으로 유배시켰다. 그 유배지가 정선 동계팔경중의 하나인 취적옥(吹笛屋)이라 전해지는데 이곳에는 김팔발(金八發)이라는 기운이 황소 같고 깊이 아는 바는 없지만 들은 풍월로 제법 문자께나 쓰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가 하루는 동네사람들을 불러모아놓고 옷소매를 걷어붙이고는 "무릇 사람이란 의리가 있어야 하는 법 만일 의리가 없다면 개나 돼지에게 옷을 입혀놓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라며 동네 사람들 중에 취적옥에 가본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영문을 모르는 동네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다시 비장한 어조로 그 취적옥에는 연산임금의 어린 네 분의 왕자님이 귀향 살이를 하고 계신다네, 그 네 분 왕자님 중에는 세자이신 노 마마도 계신다네, 한데 이 돼지 같은 인간들아 보고만 있을 것이냐, 진짜 어린 왕자들은 먹을 것이라곤 다 떨어진 소쿠리에 삶은 감자 몇 알이 전부이고 무서움과 배고픔에 울기라도 하면 무서운 병사들의 고통에 울 수도 없는 실로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처연지상(凄然之相)이었다. 금지 옥엽 하던 왕자들의 그런 처참한 모습을 김팔발이 두둔하고 나선 것이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우리는 그 연산임금 치하에서 12년 동안 백성노릇을 했고 그 분이 폭군이었든 어진 임금이었든 임금은 임금, 백성은 백성이다. 우직하고 순박한 사람들에겐 충분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한데 그런 왕자님들이 짐승 같은 대접을 받고 계시네, 의리란 무엇이고 충성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의리와 충성을 아는 자가 올바른 인간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평소엔 모르다가도 어려움에 처했을 때 상대방의 진정이 들어나는 법, 김팔발의 말은 백번 옳은 것이다. 동네사람들의 호응에 우쭐한 그는 우리가 잘되면 일등공신이요 못되면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폐세자 노마마를 옹립하고 나서면 강원도와 충청도, 황해도 일부에서 틀림없이 우리편이 되어 줄 것이요, 그리하여 군세가 어느 정도 갖춰지면 즉시 노마마를 모시고 서울로 진군합시다. 일단 거사했다 실패하면 금강산이나 오대산 깊숙이 숨어버릴 각오를 한 그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새임금 만세! 노마마 만세" 이들은 앞으로 닥쳐올 시련도 모른체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웅성거렸다.순박한 이곳 사람들은 어린 왕자 들이 딱한 곤욕을 치르는 것만 알았지 부왕연산이 천명을 버리고 10년 폭정을 계속한 사실은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때 정선고을 본관은 정광보(鄭光輔)였다. 그는 천성이 중후한 사람으로 백성들의 동향을 날카롭게 살피고 있었는데 김팔발의 역적모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김팔발을 비롯하여 가담자 모두를 잡아드리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나 거기에 연류된 동네의 몇 사람만 체포되었을 뿐 주모자인 김팔발과 그의 가족은 이미 도망친 후였다. 조정에선 정선군수의 장계(狀啓)을 받고 박원종을 비롯한 반정 공신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역모에 연류된 범인들은 목을 쳐 효시(梟示)하고 주범 김팔발은 끝까지 추적하여 체포하고 즉시 서울로 압송할 것이며 만일 도망중인 죄인에게 식량이나 의복을 제공하는 자가 있을시는 그 또한 역적으로 간주하여 극형에 처할 것이며, 김팔발을 고발한 자는 상금 천냥을 내린다는 수배문이 마을 곳곳에 나붙었다. 조용하기만 하던 정선고을에 역모에 연류된 자들의 잘린 목이 내 걸리고 그야말로 평지풍파가 일어났다.
더군다나 그 일로하여 날벼락을 맞은 사람은 폐주연산의 아들들이었다. 이날이 1506년 9월 24일로 중정 임금의 반정이 일어난지 불과 23일 후였다. 이렇게 하여 폭군 연산의 네 아들은 이곳 정선의 취적옥에서 그 짧은 일생을 끝마쳤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