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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 아침 평온한 저녁 행복한 정선 정선군소개

정선읍

정선읍

정선읍은 고구려때 잉매현, 신라때 정선, 고려때 삼봉(三鳳), 도원(桃原), 심봉(沈鳳)등 군명이 자주 바뀌었다. 공민왕2년(서기 1353년)에 군명이 다시 정선으로 개칭되어 조선 500년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본 군의 군청 소재지로서 정치, 행정, 경제, 교육, 문화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처음에는 군내면(郡內面)이라 하여 어천(漁川), 병목(甁項), 오반(五半), 송오(松五), 외반점(外半占), 북실(北室), 생탄(生呑), 상동(上洞), 중동(中洞), 하동(下洞) 등 10개 동으로 구획하고 면행정을 처리하던 것을 1906년에 면장제도로 개편하는 동시에 동하면(東下面)을 합쳐 정선면(旌善面)으로 개칭하였다. 1924년에 서면(西面)을 합하였고, 1973년 7월 1일자로 정선면이 정선읍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봉양리(鳳陽里)
    본리는 남한강 상류인 조양강(朝陽江)유역에 자리잡고, 앞으로는 대음산(현 조양산, 남산), 뒤로는 비봉산(飛鳳山) 밑에 자리잡은 양지바른 들판형국의 비봉산은 봉황(鳳凰)새가 나래을 쭉 펴고 조양강으로 힘차게 날아 내리는 듯하다고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군 소재지로 택정할 때 봉양리 지형이 제비집 같다하여 동면에 흐르는「어천」강물이 흐르는 모양이 뱀 같기에 제비새끼를 잡아먹으려 하는 지형이라고 해서, 이곳에 인재가 날수 없는 택지라 하여 이를 제살하기 위하여 세 마리 거북(龜)과 여덟 마리 학(鶴)을 돌로 조각하여 정선아리랑공원 너머 어천 방향과 하동, 상동, 강변에 묻었고, 여덟 마리 학은 비봉산과 조양산에 묻었다고 한다.
    거북과 학은 뱀을 잡아먹으니 택정할 때에 지역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신념에 조치한 것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정선 조양회에서 정선아리랑 공원에다 삼구팔학(三龜八鶴)의 비를 1985년도에 설립했다.
    본리는 1605년도 대홍수로 조양강의 유수 변경으로 인하여 넓은 백사장을 이루었는데 그후 몇 차례 홍수로 인해 비옥한 땅이 되었다. 그때는 현 정선제방이 없었는데 1936년도 대홍수로 전 가옥이 표류되다시피 된 후 제방을 쌓았는데 완전한 제방은 1961년에 완전히 쌓았다.

    (1) 상동(上洞)
    강의 상류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으로, 향교부근과 시장 중심가를 일컫는다.

    (2) 중동(中洞)
    정선감리교회 부근을 중간마을이라고 하여 이름했다.

    (3) 하동(下洞)
    정선 제1교~정선초등학교 일대로, 강의 아래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4) 비석거리(碑石)
    옛날  하동 배터거리 일대를 칭하는 이름이다.  배터거리에서 관음동으로 가는 입구에 조선시대부터 역대 관찰사, 군수의 송덕비와 충신비가 세워 진 곳이라고 해서 '비석거리'라고 한다.

    (5) 새청거리
    정선농협 부근을 말한다. 현재의 제방 일대가 병자년 대홍수로 휩쓸려나간 뒤 잡초와 잡목이 무성한 숲으로 변하자 아침과 저녁으로 참새 떼가 엄청나게 모여들어 온 동네가 떠나 갈 득 짖어댔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새 소리가 요란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러아 '새청거리'는 '쇠전(牛廛)'이 들어선 곳이라는 뜻인 '쇠전거리'가 변한 말이다.

    (6) 생탄(生呑)
    세대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가리왕산 자락인 민둔산 서남쪽 산줄기에 위치한 마을로 봉양리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한 마을이다.

    (7) 안골(內谷)
    동곡을 안쪽에 있다고 해서 '안말', '안골'이라고 했다.

    (8) 동곡(動谷)
    생탄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9) 지동골
    세대에서 (구)생탄분교 입구쪽으로 돌아 북쪽 동곡과 생탄으로 들어가는 긴 골짜기이다.  동곡으로 가는 골짜기라고 해서 '지동골'이라고 한다.

    (10) 막골
    세대에서 민둔산으로 가는 긴  골짜기이다.  '산'의 옛말인 '몰앗'에  '골짜기'가 더해진 말로 '몰앗골'이 '모앗골', '마앗골'로 변해 '막골'이 되었다.

    (11) 탑골
    관음동 서쪽에서 북쪽으로 난 골짜기이다.  관음사 부근으로 이 절을 찾는 불자들이 골짜기 안에 돌탑을 쌓아 불공과 치성을 드린 곳이라고 해서 '탑골'이라고 한다.

    (12) 진포리
    생탄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산에서 적은 양의 샘물이 흘러내려 언제나 길가로 질퍽하고 강변으로는 긴 벌이 이어진 곳이어서 '진펄'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변해 '진포리'가 되었다.

    (13) 오리장
    정선읍 소재지에서 오리(2㎞)에 위치한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4) 세대(世垈)
    봉양6리에 가장 넓은 논이 있어 사람 살기 좋다고 하며 곡식가리가 많다는데 연유된 말이라고 한다. 일명『누리대』라고도 부른다.

    (15) 회골(灰谷)
    석회석이 있어 장례식 때 분묘에 회단석을 하기 위해 불에 회를 고운 곳이다.

    (16) 관음동(觀音洞)
    하동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비봉산 구릉 소금강 뒤 계곡에 관음사(觀音寺)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라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 북실리(北實里)
    조양산과 병방산이 동남으로 뻗어 삼면이 산으로 둘러 싸였고, 북쪽으로 조양강이 굽이쳐 흐르고, 앞에는 비봉산이 우뚝 솟아 용담(龍潭)들이 옥토를 이루었고, 남으로『너투재』를 넘어 남면 광덕리, 가수리(佳水里)로 가는 지루한 산길이 있고『병방치』를 넘어 귤암리(橘岩里) 가는 험한 길이 있다.
    북실(北實)리는 옛날에 죽실(竹實)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정선읍 뒤 비봉산(飛鳳山)이 봉황새 형국이어서 봉황은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해서 봉황새가 먹이를 찾아 날아드는 모습 같다 해서『죽실』이라고도 부르기도 했다. 이곳은 농경지가 북쪽으로 향하였으나 농사가 잘 된다고 하며 북실로 개칭하였다고도 한다.

    (1) 용담(龍潭)
    용담이란 뜻은 물 언덕 강물이 깊어 용이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2) 미천(米川)
    싸내를 한자로 써서 '미천(米川)이라고 한다.

    (3) 가마실(釜谷)
    마을 형국이 흡사 가마 같다해서 불러진 이름이라고 하나 '가마실'은 '큰 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이다.

    (4) 올창바위(烏岩)
    가막바우를 '올창바우'라고도 한다. 바위 주변의 물웅덩이에 올챙이가 많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5) 마미곡(馬尾谷)
    '마'는 '마루'를 뜻하는 말이고 '미'는 '산'을 뜻하는 '뫼'가 변한말로 '마미골'은 '산 마루로 난 골짜기'라는 뜻이다. 발음이 '마미'뢰 되다보니 이를 한자로 써서 '마미곡(馬尾谷)이라고 했으며 지형이 말꼬리 같은 긴 골짜기라는 해석을 낳았으나 '마'는 '산(山)'을 뜻하는 말이다.

    (6) 맹이골
    오암에서 남쪽으로 올라가다가 삼거리에서 오른쪽인 남서쪽으로 난 골짜기이다.  오래전 가수리로 넘나드는 너툰이재 아래에 있는 골짜기 마을로 옛날 이곳에서 망아지를 키웠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하나 '맹이골'은 '마루'를 뚯하는 '마'와 '산'을 뜻하는  골짝인데 옛날에 망아지를 키웠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하나 '맹이골'은 '마루'를 뜻하는 '마'와 '산'을 뜻하는 '미'가 더해진 말이다.

    (7) 샛 골
    삼거리에서 망이골로 올라가다가 왼쪽으로 갈라지는 골짜기이다.  가매실과 맹이골 사이에 있는 샛말에 이르는 골짜기라고 해서 '샛골'이라고 한다.
  • 덕송리(德松里)
    본리는 조양강이 회류하고 있으며,『남평』으로 질러가는 반점치(半峙)를 사이를 두고 취락이 형성되었다. 정선읍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라고 한다. 옛날 정선향교가 있던 터가 있는데『돌다리』라고도 한다.  본리는 납덕동 덕(德)자와 송오리 송(松)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1) 납덕동(納德洞)
    비봉산과 방아재 계곡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넓은 산골이라고 해서 '납닥골'이로고 했는데, 이를 한자로 쓰면서 납덕동(納德洞)이라고 했다.

    (2) 내반점(內半點)
    북평면(北坪面)으로 넘어가는 반점재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내반점'이라고 한다.

    (3) 외반점(外半點)
    반점재 너머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외반점'이라고 한다. 

    (4) 송오리(松五)
    반점재 동쪽 조양강변에 있는 덕송리의 중심 마을이다.  옛날부터는 노송 5섯 그루가 있다고 해서 '송오리'라고 불렀다.

    (5) 다래(月川)
    송오 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양강이 시계방향으로 돌아 흐르면서 크고 넓은 들판을 형성한 곳이다.  마을지형이 강을 끼고, 둥근 달같이 생긴 마을이라고 하지만 '다래'는 '산'이나 '들판'을 뜻하는 옛말과 '내'가 합쳐져 '달내'가 변한 말로 훈차해 '月川'으로 되었다. 따라서 '다래'는 '냇물이 흐르는 들판'이라는 뜻이다.

    (6) 돌다리
    납닥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오래전 향교가 있었고 마을을 가로지르는 계곡에 돌다리가 있는 곳이라고 해서'돌다리'라고 했는데, 이를 한자로 쓰면서 '석교(石橋)', '석교동'이라고 한다.
  • 애산리(愛山里)
    본리는 동쪽으로 애산성(愛山城) 남쪽으로 기우산성(祈雨山城)이 있다. 이 산성은 통일신라 때 축조한 산성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과 의병항쟁 때 정선읍부 방어에 큰 몫을 한다. 앞 기우산에는 비가 안올 때 비를 오게 비는 제단이 있는데 기우제단(祈雨祭壇)이라고 한다. 본리 지명은 애산성을 그대로 붙인 것이다.

    (1) 녹도섬(綠島)
    봉양리 적거리 마을 아래 조양강에서 물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구미동 앞쪽과 오반리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이 조양강과 만나는 신촌 일대까지 커다란 삼각지가 형성되어 섬을 이루었다.  일설에는 녹두가 잘되어 '녹두섬'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나 사실은 소나무가 늘어선 곳이라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녹대 일대는 구미동을 제외하곤 사람이 살지 않던 지역이었으나, 1962년부터 정선선 철도가 개설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2) 구미(龜尾)
    어촌 북쪽에 정선역 뒤쪽에 있는 마을이다. 일설에는 마을 지형이 거북의 꼬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구미동(龜尾洞)'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가 일제 감정기에 '구미동(九尾洞)'으로 바뀌었다고 하나 녹도와 옆으로 물줄기가 감싸돌듯 휘돌면서 물가 한쪽으로 굼이 진 곳에 위치한다고 해서 '구미'라고 했다.

    (3) 오반동(五半洞)
    구미동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중심에서 정선시장이 오리 길이고, 마을 끝까지도 오리 길이라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4) 이슬재(露峙)
    이슬재골 위쪽에 있는 고개이다. 오래전 화암면 석곡 주민이 소금을 지고 넘나들던 길이기도 하다. 이슬재를 한문으로 써서 노치(露峙)라고 한다.

    (5) 어천(魚川)
    현 진성주유소 부근인데 물고기가 많아서 붙인 이름이라고 하나, '작은 내'라는 뜻이다.  '어천병목'이라고 하여, 동천을 사이에 둔 어천과 병목 사람들은 한마을처럼 친하게 지내곤 했다.

    (6) 병목(甁項)
    철미산 서남쪽 아래에 있는 마을. 동천 물길이 휘돌아 나가는 곳에 위치한 마을로 철미산 자락으로 삼면이 둘러싸인 마을의 지형이 흡사 병목 같아서 붙인 이름이다. 

    (7) 이절
    개끝 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절이 두 곳 있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8) 개끝

      구미동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정선역의 윗마을로 강변 물가 끝에 위치한다고 해서 '개끝'이라고 한다.
  • 신월리(新月里)
    조선시대에 동하면(현재 화암면)에 속하였는데 1910년에 군내면(郡內面)에 통합하였다. 와평리(瓦坪里), 신치리(新峙里), 월통리(月通里)를 병합하여 신치와 월통의 이름을 따서 신월리(新月里)라 하였다.

    (1) 와평(瓦坪)
    신월리의 중심에 있는 마을이다. 오래전 부터 기와집이 많은 마을이어서 기왓골이라고 했는데, '기와 와(瓦)'자를 써 '와평'이라고 했다.

    (2) 월통(月通)
    와평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동천이 시계방향으로 돌아 흐르면서 넓은 들판을 형성한 곳이다.

    (3) 신치(新峙)
    '새터'의 '새'를 '새롭다'는 뜻으로 보고 '새로울 신(新)'자를 써서 '신치(新峙)'라고 한다.

    (4) 드름터
    기우산 기슭에  북쪽으로 향한 산자락 능선이다. 산자락 아래로 강이 돌아가는 곳에 있는 곳이라고 해서 '도름터'라고 했는데, 이 말이 변해 '두름터', '드름터'가 되었다.

    (5) 엇재
    신치 어귀에서 덕우리(德雨里) 백우담(白雨潭)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덕우리(德雨里)
    조선시대에 동하면(현재 화암면)에 속했다가 1910년에 둔내면에 통합되었는데 덕산기, 백오담(백우담)의 이름을 따서 덕우리(德雨里)라고 하였다.

    (1) 백오담(白烏潭)
    '백오담(白烏潭)'을 '백우담(白雨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설에 따르면 연산군이 폐위되던 해에 그의 네 아들이 유배되어 취적봉에 와 살다가 사약을 받고 죽자 흰 까마귀가 이 연못가로 날아와서 석 달 열흘을 울었다고 해서 '백오담(白烏潭)'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2) 대촌(大村)
    큰말을 한자로 써서 '대촌(大村)'이라고 한다.

    (3) 덕산기(德山基)
    유촌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양산 연맥 골짜기 안에 '큰 터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다.

    (4) 거어리(巨於里)
    유촌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거어(巨於)는 '크게 늘어진'이라는 뜻으로 쇄재 아래로 길게 늘어진 골짜기 마을을 뜻한다.

    (5) 버드내(柳川)
    '버들앗'이 하천을 중심으로 변해 '버드내'가 되었도,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유천(柳川)이 되었다.
  • 여탄리(余呑里)
    고양산 밑에서 동막천(東幕川)이 마을 중심으로 북에서 남으로 흘러 동계천(東溪川)과 합류하는 깊은 고을이다. 이곳은 경지가 협소하나 땅이 비옥하고, 공기가 맑고 온화하여 잠업이 정선군내에서 제일 잘 되는 곳이다. 여탄『누에치기』라 하면 검사원도 보나마나 일등품이라고 한다.

    (1) 역둔(力屯)
    조선시대 때 역(驛)에 속한 둔전(屯田)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이를 경작하고 살던 곳이라고 해서 '역둔'이라고 한다. 지형이 흡사 삼태기 같고 마을 입구에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봄이면 아름다운 경치로 감탄한다고 한다.

    (2) 화작동(花作洞)
    동막천이 흘러 경치가 아름답다. 4월이면 진달래꽃이 만발해서 꽃놀이 터로 알려졌으며 속칭『동막』이라고도 한다.

    (3) 중북동(中北洞)
    중북골을 '증복동'이라고 한다.  북쪽으로 가는 통로로 요충지대이다.

    (4) 노루목(獐項)
    신월리 월통에서 역둔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고양산으로 드나드는 입구가 흡사『노루』목 같은 지형이라는 뜻이다.

    (5) 백평(栢坪)
    여탄리 입구인데 논이 많고 잣나무가 있어 불러진 이름이다. 여탄리 마을은 정선 부자가 났다는 곳이다. 이곳에는 옛날 쓰던 연자방아『매』가 지금도 있다.
  • 회동리(檜洞里)
    본리는 고려 충선왕 때 침봉(沈鳳) 골터로 40여 년간 읍부가 있었고 조선 때는 서하면에 속했다가 1924년에 서면이 정선읍에 합병됨에 따라 정선읍 관내가 되었으며 본리는『가리왕』산의 자작나무, 전나무, 피나무, 주목 등 원시림이 많아서 회동이라고 했다.
    북쪽으로 가리왕산이 있고 벽파령(碧波嶺)은 서쪽을 막았고, 청옥산이 남으로 넓게 자리하여 그 사이로 말목(馬項)에서부터 벽탄까지 계곡을 따라 맑은 물이 흘러내리니 그 유장이 20㎞에 이른다.

    (1) 덕둔지(德屯地)
    옛날에는 처사(處士)가 모여서 수덕하던 곳이라 하여 이름 붙인 곳이다.

    (2) 도룡동(道龍洞)
    마항에서 북쪽으로 가자가 왼쪽으로 난 골짜기이다. 도룡골은 '산'의 옛말과 안쪽을 뜻하는 '안'이 '골'과 더해진 말이 '돋안골', '도롱골'로 변해 '도룡골'이 되었으며, '산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3) 마항(馬項) 
    회동리에서 평창군 대화 진부로 왕래하던 길목인데 지형이 흡사 말목 같다하여 불리워졌다. 

    (4) 벽파령(碧波嶺)
    말목이에서 서쪽 평창군 대화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중앙산과 청옥산 사이에 있는 벽파산 밑에 있는 고개로 조선시대 정선에서 평창군 진부 대화로 연결되는 큰 길이 나 있었다.

    (5) 산막골
    회동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오래전 산삼을 캐러 다니던 심마니들이 움막을 치고 살던 곳이라고 해서 '산막골'이라고 한다.

    (6) 세곡(細谷)
    가리왕산 중봉으로 오르는 길목인데 마을형태가 협곡에 길게 촌락이 있기 때문에 속칭『가는 골』이라고도 한다.

    (7) 못골
    납덕골 위쪽 말랑에 있는 마을이다. '못'은 '산'의 옛말이 변하여 '몰', '못'으로 변한 것으로 '못골'은 '산 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8) 어은골
    샛골 서쪽에서 북쪽 가리왕산 쪽으로 난 골짜기이다.  가리왕산 상봉과 중봉에서 흐르는 물이 어우러지는 곳이라고 해서 '어운골'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어은골'로 변했다.

    (9) 얼음굴 
     
    음지마을 가리왕산자연휴양림 관리사무소 입구 바로 위에 있는 동굴이다.
  • 용탄리(龍灘里)
    1930년 4월 1일자로 서면이 정선면에 편입되면서 정선면 관내가 되었다. 자연부락으로는 내벽탄, 외벽탄, 노미, 이평, 세곡, 곡구, 비룡동, 신론, 월평, 행매동 등 10개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었으며, 용탄은 비룡동의 '용'자와 벽탄의 '탄'자로 리명을 정했다.

    (1) 월평(月評) 
    다래들을 한자로 쓰면서 '다래'는 '달 월(月)'로 하고 '들'은 '들 평(坪)'으로 하여 '월평(月坪)'이라고 한다.

    (2) 노미(魯旀)
    벽탄 남쪽 솔치 밑에 있는 마을로 본래 이름 노며(魯旀)였다. '뇌매'라고도 부른다.

    (3) 행매동(行邁洞) 
    벽탄 서쪽 성마령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에 행매원(行邁院)이라는 역원(驛院)이 있었다고 해서 '행매동'이라고 부르며, '원골'이라고도 한다.

    (4) 비룡동(飛龍洞)
    가리왕산 하봉으로 이르는 통로인데 비룡동굴이 있다. 이 굴에 전란 때 피난한 흔적이 있다. 석순은 훼손되었고 용소라는 곳에는 물이 있다. 또한 마을 뒷산에 용소가 있는데 뱀이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고 옛 귀향지라고도 한다.

    (5) 골어구
     실룬과 비룡동으로 갈라지는 골짜기 입구에서 박달재 아래쪽까지에 있는 마을이다. 비룡동 마을에 이르는 골짜기 어귀라고 해서 '골어귀'라고 했는데, 이 말이 변해 '골어구'가 되었다.   골어구를 '곡구(谷口)'라고도 한다.

    (6) 신론(新論) 
    '실룬'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생겨난 이름니다.

    (7) 세곡(細谷) 
    가는골이라고 한다. 내벽탄에서 비룡동으로 가는길 우측으로 봉양리 안골과 접한 길게 깊숙이 위치했다 하여 붙인 지명이다.

    (8) 귀리벌
    노미 남쪽에 있는 강변 마을이다. 마을 형국이 사람의 귀를 닮았다고 해서 '귀리벌'로 불렀다고 한다.  귀리벌을 한자로 써서 '이평(耳坪)'이라고 한다.

    (9) 벽탄(碧灘)  
    용탄리의 중심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 경금산 가파른 절벽 밑으로 조양강 물길이 굽이도는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해서 '벽탄'이라고 한다.

    (10) 기곡
    성마령으로 왕래하는 길목으로 옛날 한양을 오가는 관문이다.  오래전 이곳에 사람들이 터를 이루고 산 곳이라고 해서'터골'이라고 한다.
  • 광하리(廣河里)
     조선시대 서상면에 속했다가 1924년에 정선면에 병합되었다. 정선의 관문 마전치(麻田峙) 일명『비행기재』밑에 있는 넓은 마을인데 마을 앞에 조양강이 굽이쳐 흐르며 병방산이 층층절벽으로 절경을 이루고, 이 지역은 엽연초, 잠업, 채소가 잘되는 마을이다.  본리는 망하(望河)마을의 하(河)자와 광석(廣石)마을의 광(廣)자를 합쳐 이름 붙였다.

    (1) 광석(廣石)
    기암절벽을 이룬 앞산과 강 주위의 넓은 반석이 있어 생겨난 지명이다.

    (2) 상평(上坪)
    농경지가 넓고 비옥해서'위쪽의 평지 들판'의 뚯인 '웃드루', '우뚜루'라고 했다..

    (3) 송단(松丹)
    마을뒷산에 붉은 소나무가 많아 유래된 지명이다.

    (4) 여곡(余谷)
    사방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형에다가 땅이 비옥하여 오곡이 풍성하다고 해서 '여곡'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하나 여곡은 '내멜'에서 나온 말이다.

    (5) 소탄(召呑)
    여곡 서쪽 목재 너머에 있는 골짜기 마을이다.  '소'는 '사이'라는 뜻이고 '탄(呑)'은 '골짜기'의 뜻에 해당하는 '단'을 '呑'으로 취음한 말이다. '소탄'은 장갓산과 목재 사이에 있는 '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이다.

    (6) 마전(麻田)
    삼밭이 많아 대마가 잘되는 마을이라고 해서 '마전(麻田)'이라고 한다.

    (7) 모평(牟坪)
    일명 모마루라고도 한다. 마을이 따뜻해 오래전부터 보리농사가 잘된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8) 망하(望河)
    송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일설에는 옆에 강이 흐르는데도 물을 이용할 수 없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하나 멀리 사방으로 강물을 굽어 살펴 볼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9) 전곡(前谷)
    광하리 들어서면 먼저 보이는 골이라 하여 이름 붙었다.

    (10) 군언(君彦)
    옛날 선비가 살았다해서 불려진 이름이다.
  • 귤암리(橘岩里)
    1930년 4월1일에 서하면에서 정선면으로 합면되었다. 병방산과 나팔봉절벽이 강을 따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순전작 지대다. 본리는 의암과 귤화마을 이름을 합쳐 귤자와 암자를 따서 이름하였다. 일명 줄을곳(注乙串)이라고도 한다.

    (1) 귤화(橘花)
    봄철이면 마을에 귤꽃이 만발한데서 유래되었다.

    (2) 의암(衣岩)
    마을 아래에 있는 옷바위를 한자로 써서 '의암(衣岩)'이라고 한다.

    (3) 동무지(童舞地)
    옷바위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동무지는 '산 밑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4) 만지산(萬支山)
    산 정상에 오르면 능선들이 사방으로 무수하게 뻗어있어 '만지산'이라고 불렀다.

    (5) 월포(月浦)
    산이 둘러싸고 있는 마을의 형국이 달과 같다고 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6) 나팔봉(喇叭峯)
    수리봉을 '나팔봉(喇叭峰)'이라고 한다.  귤화 서쪽에 있는 해발693.4m의 봉우리 이다.  산 모양이 나팔처럼 생겼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 가수리(佳水里)
    조선시대에 서상면에 속했다가 1906년에 서면에 합쳤다가 다시 서면이 정선면에 합병되었다. 지세는 갈래 산맥의 최단이고 서로 월괘봉, 능봉이 둘러싸였고 조양강이 귤암리에 흘러 내려오고 수미 앞에는 남면에서 흐르는 지장천이 합수되어 가탄을 지나 신동 운치로 흐르는 강은 강변에 붉은 기암이 쌓여 경치가 대단히 아름답다. 가탄과 수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지명이다.

    (1) 수미(水旀)
    가수리의 중심마을로 마을 앞을 흐르는 강물이 아름답다고 하여 수미(水美)라고 불렸다고 하나 '수며(水旀)'에서 나온 지명이다.

    (2) 북대(北垈)
    수미 앞 서쪽 강 건너에 있는 마을로 '뒷대벌'이라고도 한다. 속칭 대발(垈拔)이라고도 하는데 이 마을은 북쪽을 향해 마을이 형성되어 '북대'라고 부른다.

    (3) 갈미(渴旀)
    마을 앞에는 강물이 유유히 흐르나 마을에는 전혀 물이 없는 마을이라 해서 갈미라고 붙였다.

    (4) 가탄(佳灘)
    수미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물이 아름답다고 해서 '가탄'이라고 부른다고 하나, 가장자리를 뜻하는 옛말이 한자로 차음되면서 아름다울 가(佳)자를 '가탄'으로 바뀌었다.

    (5) 유지(有池)
    이 마을은 가수리에서 가장 기름진 농토라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다.

    (6) 하미(下旀)
    속칭『헤매』라고도 한다. 가수리에서 제일 끝에 위치한 곳이다. 이 강물에는『수달』이 많이 살고 있다. 아직도 인도선을 이용하며 물이 얼지 않아 겨울에는 섭다리를 놓아야 한다.


    (7) 문안골
    가수리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예전에 너툰이재를 넘어 정선 읍내로 가는 길목으로 골짜기에서 물이 많이 흘러 '물안골'이라고 했는데, '무량골'로 부르기도 한다.  
담당부서 : 정선읍
연락처 : 033-560-2601
최종수정일 : 2017-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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